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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펑크룩의 지표를 열게된 말콤 맥라렌&비비안 웨스트우드 - 죽기엔 너무 젊고 살기엔 너무 타락했다
    기묘한 이야기 2019. 9. 1. 16:00

     

    <펑크룩의 지표를 열게 되는 말콤 맥라렌과 '펑크의 여왕' 비비안 웨스트우드>

     

    1971년 영국의 킹 로드,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Let It Rock'이라는 패션샵을 열게 됩니다.

     

    이후 1972년 매장이름을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로 바꿨으며,

    (1986년 '시드와 낸시' 영화에 이 문구를 '죽기엔 너무 젊고 살기엔 너무 타락했다'로

    인용하면서 이 문구는 시드가 남긴 말로 와전되며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타투문구,

    티셔츠의 프린트 문구가 되기도 합니다) 1975년 'SEX'라는 이름의 펑키 패션샵을

    런던에서 오픈하며 본격적으로 옷가게를 경영하기에 이릅니다.

     

     

     

     

    <본격적인 펑키 패션샵 'SEX'에서 찍은 당시의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매장을

    운영하면서부터 스티브 존스(보컬), 폴 쿡(드럼), 월리 나이팅게일(기타)로 이루어진

    'The Strand'라는 이름의 밴드멤버들은 그곳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The Strand는 재정상황이 좋지 않아 훔친 악기들로 연주했으며

    밴드의 보컬이었던 스티브 존스는 재정적인 여유와 뉴욕에서의 매니저 경험,

    그리고 많은 가수 및 밴드들과 친분이 있던 말콤 맥라렌에 밴드의

    매니저가 되어 달라고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후에 베이시스트 글렌 맷록을 영입하고 기타를 담당했던 월리 나이팅게일이

    퇴출당한 뒤 영입된 존 리든(후에 조니 로튼으로 불림)을 밴드의 새 보컬로 임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그는 '왜 나를 보컬로 임명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라고 말합니다),

    The Strand 밴드는 매니저가 된 말콤 맥라렌이 지은 'Sex Pistols'라는 이름으로 바뀌기에 이릅니다.

     

    <1975년 런던에서 결성된 섹스 피스톨즈는 로큰롤 역사에서 첫 번째 '세대차이'를 만들어 낸다>

     

    베이시스트 글렌 맷록이 존 베벌리(본명은 시몬 존 리치이며, 친부가 사망하고 의붓 아버지가

    생기자 그의 성을 따 존 베벌리로 이름을 바꿉니다)로 교체되고(글렌 맷록이 비틀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방출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합숙생활을 하던 중, 존 베벌리 존 리든의 애완용 햄스터

    '시드'에 물려 '리든의 시드는 정말 맹렬(vicious)하군!' 이라 말한 데서 따진 'Sid Vicious'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Sex Pistols의 전설이 시작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펑크의 전설로 화자 되는 섹스 피스톨즈지만 그들의 '음악적 실력'은 항상 논외시 돼 오고 있다,

    존 리든에 의하면 시드가 탬버린을 연주하고 자신과 함께 'Alice Cooper'의 커버를 연주하며

    거리 악사 생활을 할 때면 행인들은 조용히 하라는 의미에서 그들에게 돈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만들어주는 무대의상을 입고(그들은 처음 무대의상을

    보고 '진짜 웃기다'라고 말합니다) 1975년 11월 6일 세인트 마르틴스 콜리지에서의

    첫 콘서트를 시작으로 2년 반 동안 넉 장의 싱글 앨범과 한 장의 스튜디오 앨범인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를 냈을 뿐인데도 '영국 펑크 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밴드', '영국 펑크 운동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으며 모든 펑크 마니아들의 우상이 됩니다.

     

    그러던 Sex Pistols는 1978년 1월 US 투어를 끝으로

    조니 리든의 밴드 탈퇴를 기점으로 공식해제가 되고 맙니다.

    (여기엔 밴드결성 전부터 친구였던 보컬 존 리든이 당시 시드의 여자친구였던

    낸시에 대해 '낸시라는 계집이 시드를 보컬자리에 올리려고 별짓을 다 했다',

    '둘에게서 뜨거운 사랑이란 건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약에만 쩔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한 데서 해체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공연 때마다 '퍼포먼스' 덕분에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며 2년 반 동안의 짧은 활동으로 지금까지도 화자 되는 밴드>

     

    섹스 피스톨즈가 펑크 정신을 대변하는 밴드'로 인식되며 인기를 끌 때 즈음,

    미국에서 건너온 그루피(록 밴드를 쫓아다니는 소녀 팬)인 미국국적의

    낸시 스펑겐이라는 여성과 1977년에 연인관계가 됩니다.(참고로 낸시는 1958년생입니다)

     

    <급속도로 연인관계가 되었던 시드와 낸시>

     

    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 부모들도 멀리했던,

    마약 중독자이며 청색증 탓인 잦은 신경질과 난폭한 성격,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시도와 매춘을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퇴폐적이었던 낸시에게

    시드는 마치 필연인 양 그녀의 타락함에 매료되고 맙니다.

     

     

     

    <시드만큼이나 유명한 그의 목걸이는 낸시가 어떠한 의미 갖고 '채운' 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은 펑크 록 밴드인 'The Pretenders'의 보컬 크리시 하인드(오른쪽 사진)가 선물한 것이다>

     

    히피이면서 마약 딜러였던 어머니 탓에 비교적 쉽게 약을 했던

    시드는 낸시와 만나면서 헤로인에 중독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낸시를 만나는 것에 반대와 불만을 드러내는 멤버들을 아랑곳 않은 체

    점점 타락의 나락을 찾게 되는 시드는 공연 투어 때 조차 낸시가 함께하길 원해

    멤버들과 잦은 다툼을 가지게 되고, 헤로인 중독으로 말미암은 극도의 신경질이

    부추긴 폭력성과 무대에서의 자해 등 점점 멤버들 간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무대에서 자해를 하는 시드 비셔스>

     

    그러다 결국 시드의 지나친 폭력성 때문에 벌어지는 잦은 폭행사건과

    약물중독 상태로 무대에서 벌이는 각종 사고, 1978년 섹스 피스톨즈의

    마지막 무대가 되는 US투어에 낸시를 동행시킬 경우 베이스를 바꾸겠다는

    멤버들과 매니저의 조치 후에 발생한 약에 취한 시드의 기행들로 콘서트가

    엉망이 되자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체하기에 이릅니다.

    (존 리든은 당시 "This is No Fun, at all"이라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서로의 타락을 탐닉하게 되는 시드와 낸시>

     

    한편, 섹스피스톨스의 해체 후에도 계속 이어지던 시드와

    낸시의 연인관계는 1978년 10월 12일 아침, 뉴욕 맨하탄에 있는

    첼시호텔 객실에서 낸시가 칼에 찔린 채 발견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20살 낸시의 죽음, 당시 사건은 각 신문매체의 1면을 장식하며 대서특필 된다>

     

    결국 시드 비셔스는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여자친구인 낸시

    스펭겐을 칼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기소당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시 42nd Street에서 시드가 직접 구매한 낸시를 찌른 칼이 시드에게서 발견됩니다.

     

    처음에 약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던 시드는,

    사건 당일 낸시와 다툼 끝에 그녀를 찔렀지만, 그녀를 죽일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자신은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자신을 똥처럼

    취급했다고(she treated me like shit) 진술하기에 이릅니다.

    (후에 낸시가 강도사건이나 마약거래에서 살해되었으며, 약에 취한

    시드가 자포하는 심정으로 죄를 인정했다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한편 시드의 펑크 록 가수 친구들 무리가 사전 심리를 들으려 참석한 가운데

    시드를 본 법정화가인 마릴린 처치는, 그의 당시 인상을 '내가 법정에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섬뜩하고, 가장 여윈 사람이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낸시 스펭겐 살해혐의로 체포된 시드 비셔스의 머그샷>

     

    재판은 시드의 변호사인 제임스 머버그의 대단한 능력으로 간신히 그를 보석으로

    풀려나게 하지만, 그것이 결코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낸시가 죽은 지 열흘 후인 10월 22일 시드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열흘 후에는 가수 패티 스미스의 동생인 토드 스미스를 폭행해 다시금 재판을 받게 됩니다.

     

    1978년 12월 9일 체포되어 55일간 Rikers 섬의 감옥에서 보낸 그는 1979년 2월 1일

    매니저 말콤 맥라렌의 보석금 마련을 위한 노력 덕분에 또다시 풀려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출소 당일 시드가 자살시도 후 만났던 새 여자친구인

    미셸 로빈스와 뉴욕 63 Bank St에 있는 아파트에서 조촐한 파티를 엽니다.

     

    <낸시 이후의 짧은 여자친구였던 미셸 로빈스>

     

    여기서 시드의 여자친구인 미셸 로빈스는 시드가 복용할

    헤로인을 그의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배달받게 됩니다.

     

    이후 시드는 헤로인을 복용하고 늦은 밤 미셸 로빈스와

    잠이 들어 다음날 늦은 아침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됩니다.

     

    부검결과 시드 스스로 세 번째 복용에서 너무 많은 양(80% 순도의 헤로인)을

    복용한 탓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음이 밝혀졌으며, 헤로인 복용에 사용된

    주사기, 숟가락, 그리고 헤로인 잔여물들이 시체주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한편, 낸시 옆에 나란히 매장되기를 원했던 시드의 엄마는 유대인이었던 낸시를 따라

    시드를 유대인 묘지에 매장할 수 없었기에(그리고 낸시의 부모가 원하지 않았기에)

    그 주변에 유골을 뿌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 시드의 자켓 주머니에서 발견한

    그의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약조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합의에 따라 그 반을 이행해야 합니다.

    내 아기들인 가죽자켓, 바지, 그리고 오토바이 부츠를 나와 함께 묻어주세요.

    Goodbye.'

     

    <낸시가 죽기 몇 주 전 찍힌 그들의 마지막 모습>

     

     

    결국, 1957년 5월 10일생인 시몬 존 리치-베벌리는 시드 비셔스라는 이름으로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의 22년간의 삶을 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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