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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윈스턴 오노 레논 - 존 레논 사망 일지
    기묘한 이야기 2019. 9. 1. 06:00

    <존 윈스턴 오노 레논(John Winston Ono Lennon, 1940. 10. 9 - 1980. 12. 8)>

     

    1980년 12월 8일 오후 10시 49분 다섯 발의 마른 총성음이 연달아 울립니다.

     

    네 발의 탄환이 한 사내의 몸을 그대로 관통하였고 그 사내는 루즈벨트병원에

    실려가 의사들의 소생을 위한 노력에도 안타깝게 과다출혈로 절명하고 맙니다.

     

    오후 11시 15분 당시 ABC방송에서 Monday Football Game이 프로가 진행되던 중,

    Howad Cosell이 세계에 레논의 사망소식(dead on arrival)을 알리게 됩니다.

     

    "This, we have to say it, is just a football game, no matter who wins or loses.

    An unspeakable tragedy, confirmed to us by ABC News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outside of his apartment building on the West Side of New York City,

    the most famous perhaps of all of The Beatles, shot twice in the back,

    rushed to Roosevelt Hospital, dead on arrival."

     

     

    <NBC Tonight Show에서 프로 진행 중, 존 레논의 죽음이 속보로 알려졌다>

     

     

    <당시 성 패트릭 성당에서 미팅을 하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인은

    '그의 죽음은 비극이며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데 대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라고 코멘트 한다>

     

     

    John Lennon

    7:30am December 8th 1980

    1980년 12월, 12월 중 가장 따듯했던 그날의 태양이 

    검은 기모노를 입은 존 레논을 침대에서 빠져나오게 합니다.

     

    뉴욕시민이 기억할 정도로 12월의 가장 따뜻했던 그날,

    하지만 존과 요코는 그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존이 35살, 요코가 42살이던 1976년 그들은 늦둥이 아들을 얻게 되고

    자신과 같은 쓰린 유아시절을 되물려주기 싫은 존이 house husband를

    선언하며 종적을 감추고 전형적인 주부의 생활을 하던 그에게

    '아빠가 정말 비틀즈 였어?'라는 아들의 질문에 다시 곡 작업에 들어가

    'Double Fantasy'라는 앨범을 내며 다시금 왕성한 활동에 돌입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아들 Sean Lennon을 위해 음악, 정치, 언론에서 종적을 감쳤던 존>

     

    9:00am

    존과 요코는 다코타 아파트를 나와 West 71st Street에

    위치한 카페 La Fortuna에서 아침을 먹습니다.

     

    존은 에그즈 베네딕트(머핀빵 위에 달걀과 햄을 얹은 음식)를

    먹은 후 카푸치노와 지탄담배(프랑스의 필터없는 담배)를 핀 후에

    마치 '함부르크 시절의 젊은 존 레논' 처럼 이발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롤링 스톤지의 사진기자 애니 라이보비치와의

    작업을 위해 다코타 아파트에서 그녀를 기다립니다.

     

    <Cafe La Fortuna>

     

    11:00am

    다코타 아파트에 방문한 애니 라이보비치를 환영한 그들은

    잡지의 커버를 장식할 사진에 대해 아이디어를 짜냈으며,

    이에 따라 존이 벌거벗은 체 태아의 웅크린 자세로 요코에게

    매달려 키스하는 사진들을 찍기 시작합니다.

     

    존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으며 열정적으로 사진촬염에 임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롤링 스톤지의 1981년 1월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1:00pm

    샌프란시스코 라디오 프로듀서인 데이브 숄린과

    다코타 아파트에서 3시간여의 마지막 인터뷰를 합니다.

    (매체를 통해 사망 30주년을 맞이해 롤링스톤지가

    1980년 12월 5일 9시간에 걸친 그의 마지막 인터뷰를

    공개했다고 알려졌으나 진짜 마지막 인터뷰는

    데이브 숄린과 자신의 아파트에서 한 인터뷰입니다)

     

    4:30pm

    인터뷰 후 존과 요코는 요코가 이름 붙인 Walking on Thin Ice라는

    제목의 디스코 음반을 다시 믹싱하기 위해 집을 나서고,

    숄린은 그런 그들은 스튜디오까지 태워다 주기로 합니다.

     

    차에 타기 전 몇몇 팬들 중 한 명이 존에게 다가와

    Double Fantasy 앨범을 건네며 사인을 요청합니다.

     

    빨간 티셔츠 위에 파란 스웨터와 검은 가죽켓을 입은 존은 앨범에 자신의

    사인을 한 후, 그 팬에게 "Here, is that what you want?"라는 말과 함께 돌려줍니다.

     

    당시 팬들에게 있어 커다란 보물과도 같았던 존의 사인을 받은 그 팬은

    주변에 있던 다른 팬에게 '호놀룰루(하와이 주에 있는 항구도시)에서는

    이것을 믿지 않을 거야'라며 흥분한 듯 말합니다.

     

    이후 숄린은 존과 요코를 녹음 스튜디오인 Record Plant에

    데려다 준 후, 샌프란시스코 공항 쪽으로 향합니다.

     

    한편, 녹음 스튜디오에 도착한 존과 요코는 4시간 반 정도를 믹싱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Walking on Thin Ice이라는 요코의

    싱글앨범이 될 음반의 믹싱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존이 요코 그녀 자신도 넘버원 곡을 가지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Double Fantasy 앨범을 낸 게펜 레코드사의 데이비드 게펜은 그런 존을 보고

    자기가 본 중에 가장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후에 전합니다.

     

    <요코의 싱글앨범 Walking on Thin Ice>

     

    10:30pm

    믹싱작업이 끝나고 스텝들과 다음날 오전 9시에 만날 것을 약속한

    그들 부부는 외식을 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바로 집으로 향하기로 합니다.

     

    프로듀서인 잭 더글라스에게 존은 가기 전 웃음 지으며

    "See you tomorrow morning, bright and early!"라고 말합니다.

     

    10:35pm

    존과 요코는 그들이 빌린 리무진으로 Central Park West를

    따라 다코타 72번가 입구로 향합니다 .

     

    10:48pm

    다코타 아파트 입구 바로 앞에 차량이 주차되어 있어

    존과 요코는 건물의 바깥쪽 통로에 내리게 됩니다.

     

    먼저 내려 걸어가는 요코를 따라 안뜰로 통하는 석조 아치 통로를

    걷던 존의 등 뒤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말합니다, "Mr. Lennon?"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존의 뒤에는 녹음 스튜디오에 가기 전

    자신이 앨범에 사인을 해주었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체

    38구경 리볼버로 자신을 겨누고 있습니다.

     

    10:49pm

    처음 두 발이 존의 등을 관통합니다.

     

    다음 두 발이 존의 어깨를 관통합니다.

     

    또다시 발사된 다섯 번째 발사는 다행히 빗나갑니다.

     

    존은 비틀거리며 가까이에 있던 경비원 근무소 쪽으로 다섯 걸음을 걸어가

    "I'm shot"이라는 말을 힘겹게 내뱉고는 쓰러져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이때 잡지를 보다 총소리에 놀란 경비원 제이 헤이스팅스는 비틀거리던

    존을 보고 책상 아래 부착되어 있던 알람 버튼을 눌러 경찰을 호출합니다.

     

    요코는 쓰러진 존의 머리를 감싸 안은 체 오열하기 시작했고,

    채프먼이 떨어뜨린 총을 발로 차버린 경비원 제이가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라고 얼떨결에 묻자

    그때까지 존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채프먼은 침착하게 대답합니다.

     

    "난 방금 존 레논을 쐈어"

     

    이윽고 채프먼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자신이 무장하지 않았음을

    몇 분이 체 지나기도 전에 도착한 경찰들에게 보이며 가만히 들고 있던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두 명의 경찰관이 몸수색 후 채프먼에게 수갑에 채웠으며,

    다른 두 명의 경찰관은 존에게 갔습니다.

     

    요코는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는 존을 보며 오열하고 있었고

    순찰경관 앤터니 팔마는 신입경찰 한 명과 존을 제이슨 모란

    경찰관의 순찰차 뒷좌석으로 옮깁니다.

     

    경비원 제이는 존이 뒷좌석으로 옮겨지던 순간에 들리던

    뼈들이 삐걱거리던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전합니다.

     

    곧이어 2분 이내의 거리는 온통 사이렌 소리로 가득 차게 됩니다.

     

    열다섯 블록 떨어진 루즈벨트 병원으로 후송되던 존은,

    제임스 모란 경관의 "Are you John Lennon?"이라는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 하며 신음하며 머리를 끄덕입니다. 

     

    한편, 요코는 팔마 경찰관의 순찰차에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계속해서 팔마에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 좀 해줘요, 그가 괜찮다고 말해줘요'라며 오열합니다.

     

    11:01pm-11:30pm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실로 향하는 순간 존은 이미 총상으로 약 1리터가

    넘는 피를 흘렸는데, 이것은 그의 혈핵 총량의 80퍼센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병원에 도착함과 동시에 사망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지만,

    7명의 외과의사로 구성된 팀이 그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소생술을 시도하지만

    30여 분간의 시도에도 존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자 그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응급실 책임자였던 스테판 린은 요코에게 존의 사망소식을

    전하고, 요코는 이해하기를 거부하며 오열하기 시작합니다.

     

    존의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대량의 출혈 때문에 쇼크사로 기록되었고,

    그렇게 마흔의 나이로 존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사망 당시의 존 레논>

     

     

    Mark Chapman

    am December 8th 1980

    채프먼은 추운 날씨와 오래 걸릴 시간을 대비해 긴 내복을

    두 벌씩 껴입고 재킷 위에 오버코트를 걸친 후 녹색 목도리와

    색안경을 착용했으며, 38구경 리볼버를 코트의 안쪽주머니에

    숨기고는 나중에 경찰들이 찾기 쉽도록 자신의 소지품 모두를

    호텔방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는(기한 지난 여권과 여배우 사진,

    성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코타 아파트에서 스무 블록

    떨어진 7th Avenue에 있는 쉐라톤 호텔에서 나옵니다.

     

    이후 서점에 들러 호밀밭의 파수꾼 책을 구매하여

    책 표지 안쪽에 This is my statement'라고 써놓은 뒤

    그 밑에 'Holden Caulfield'(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라 서명합니다.

     

    그는 가정부와 함께 산책하는 존의 아들인 숀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는 존의 노래인 'Beautiful Boy'를

    인용해 숀에게 Beautiful Boy라며 칭찬하기도 합니다.

    (진위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뉴저지에서 온 아마추어 사진작가이자 비틀즈의 팬이었던

    폴 고레시와 대화를 나누던 채프먼은 레논을 보기 위해

    지난 사흘간을 보냈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팬들 속에 파묻혀 다코타 아파트 주변을 서성이며

    존 레논과 관련된 스텝들이 분주히 이동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이윽고 아파트에서 나와 녹음 스튜디오로 향하는 존에게 다가가

    그의 유작앨범이 된 Double Fantasy를 내밀며 사인을 요청합니다.

     

    빨간 티셔츠 위에 파란 스웨터와 검은 가죽켓을 입은 존이 앨범에 자신의

    사인을 한 후, "Here, is that what you want?"라는 말과 함께 앨범을 돌려주자

    채프먼은 기뻐하며 폴 고레시에게 '호놀룰루에서는 이것을 믿지 않을거야'라며 우쭐댑니다.

     

    두 사람은 다코타 아파트 근처에서 2시간가량을 잡담하며 보내다,

    고레시가 집으로 간다고 하자 채프먼은 마치 그의 마음을 돌리려는 듯

    '레논이 곧 집에 오면 네가 가진 앨범에 사인받을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고레시가 다른 날에 존의 자필서명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고

    고레시에게 채프먼은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거라며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당시 폴 고레시가 찍은 채프먼에게 사인을 해주는 존 레논, 우측이 마크 채프먼>

     

    10:48pm

    이때까지도 계속 다코타 아파트 주위를 서성이며 존을 기다리던 채프먼은,

    안뜰로 통하는 석조 아치 통로를 걷는 존을 발견하고는 나지막이 말합니다. 

     

    "Mr. Lennon."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 존의 얼굴이 비치는 순간

    채프먼은 한쪽 무릎을 꿇은 체 손에든 38구경 리볼버를 발사합니다.

     

    10:49pm

    처음 두 발이 존의 등을 관통합니다.

     

    다음 두 발이 존의 어깨를 관통합니다.

     

    또다시 발사된 다섯 번째 발사는 무위로 그칩니다.

     

    비틀거리며 가까이에 있던 경비원 근무소 쪽으로

    걸어가는 존을 채프먼은 말없이 무심하게 쳐다봅니다.

     

    곧이어 도착한 경찰들을 채프먼은 오버코트를 벗어젖히고

    38구경 리볼버도 내팽개친 체 뉴욕에서 사 자신이 직접 책 첫 장에

    'This is my Statement', 'Holden Caulfield'라고 써놓은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책을 주머니에서 꺼내 읽고 있는 모습으로 맞이합니다.

     

    곧이어 채프먼은 수갑에 채워지게 됩니다.

     

    <마크 채프먼이 존 레논을 피격하는 데 실제 사용한 총>

     

     

    * 마크 채프먼의 재판기록은 '번외단편-시대의 재판, 존 레논을 죽인 마크 채프먼'을 참조하세요

     

     

    양산된 루머들

    The Assassination Informal Committee, 암살 정보위원회라

    불리는 공신력 없는 단체가 유포한 설들과 각종 음모론을

    제시하는 존 레논의 죽음을 다룬 서적들과 여러 호사가에 의해

    마크 채프먼의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음모론의 목차를 만들게 됩니다.

     

    당시 존 레논이 대중들에게 복귀하며 정치와 관련해 껄끄러운 행보를

    이어나갈 것을 우려한 CIA가, MK Ultra 프로젝트의 마인드 컨트롤을

    사용해 JFK를 암살했던 것처럼 마크 채프먼을 조종했다는 대표적인 설부터,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 책 속에 숨겨 있던 코드에 조종됐다는 설도 있습니다)

    채프먼이 지독한 존 레논의 스토커였으며 광적인 팬심에 그만 자신이

    존 레논이고 존 레논을 가짜 존 레논이라 생각에 살해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채프먼의 이러한 이미지는 사실 그의 변호사가 즉흥적으로 말한 '채프먼이

    비틀즈를 칭송했습니다'라는 말이 와전되면서 부풀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 와전되거나 부풀려지거나, 혹은 만들어진 루머들이 너무 많아 이상 생략합니다)

     

     

    담백한 진실

    그렇다면 마크 채프먼의 존 레논 살해 동기와 그와 관련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1955년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마크 채프먼은, 어려서부터 마약인 LSD를

    여러 차례 경험하고 보통의 또래보다 훨씬 많은 말썽을 부리며 자라옵니다.

     

    다른 친구들처럼 비틀즈의 포스터를 방안 곳곳에 붙이고 기타를 연주하며

    그들의 더벅머리 헤어스타일을 흉내 내며 비틀즈 마니아였던 그는,

    14살 때부터 몇 번의 가출을 일삼다 15세 때 2주간의 가출 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고 하얀 셔츠를 입고 십자가 목걸이와 성경을 들고

    학교 쉬는 시간마다 성경공부를 하며 예수 추종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어 그는 YMCA 캠프 도우미로 있으면서 어린이를 돕는 등의 선행을

    하는가 하면, 레바논에 있는 YMCA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기도 합니다.

     

    그 후 그는 제시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제시카도 일주일 내내 성실하게 일하며 총을 혐오하며

    독실한 예수 섬김을 보여주는 채프먼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채프먼은 그녀가 다니는 테네시주의 조그마한

    장로교계 학교인 Covenant College를 다니지만, 한 학기 만에

    중퇴하자 제시카도 그와 관계를 단절합니다.

     

     

     

    <마크 채프먼의 비교적 어릴 때의 사진들(그는 1955년생이다)>

     

    아틀란타로 돌아온 채프먼은 이번엔 총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며,

    Atlanta Area Technical School에서 경호원 훈련을 받습니다.

     

    졸업하기 위한 권총 사격시험에서 커트라인인 60점을 훌쩍 넘긴 88점을

    받은 그는, 1977년 초까지 아틀란타 주변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다

    하와이로 이주해 Castle Memorial Hospital에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마루를 닦는 일을 하다 후에 X-ray 인화공의 조수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1979년 빵집 주인의 딸인 일본계 미국인 글로리아

    히로코와 결혼하여 호놀룰루에 있는 아파트로 이주하기에 이릅니다.

    (논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채프먼이 존 레논이 연상의 일본계 미국인과

    결혼한 것이 그의 배우자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본래 부유한 빵집 주인의 딸이었던 그녀 덕분에 채프먼은

    한 달에 425달러나 하는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미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어머니와 처가에서

    돈을 빌려 수천 달러의 미술작품들을 샀다가 파는가 하면,

    우연히 통화하게 된 와이키키의 미술관에서 일하는 여성판매원

    팻 칼슨과 일주일에 3번 몇 시간씩이나 대화하기에 이릅니다.

     

    병원 일을 하던 채프먼은 다시 저임금의 경호원 직업을 얻었다가

    마지막으로 와이키키 콘도니미니엄에서 정비공을 일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서 가슴에 다는 명찰에 그 스스로 개명한 이름인 존 레논을 써놓습니다.

     

    이때 마크 채프먼은 부모님의 이혼과 두 차례의 자살시도,

    신경쇠약 때문인 신경질 탓에 광적인 운전과 조급함에

    그녀를 기다리지 못하고 울려대는 경적에 사소한 시비들로

    말미암아 그의 부인은 40킬로를 간신히 넘길 정도였습니다.

     

     

    <글로리아 히로코의 사진들>

     

    20대 중반이 체 되기도 전에 이토록 많은 변화를 겪은 채프먼은

    전문가들과 그의 아내의 증언들을 통해 강박증으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다고 결론 내리게 됩니다.

     

    그가 어떠한 것에 관심을 두게 되면 그것에 사로잡혀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고, 그것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그는 TV나 라디오에 강박증을 가져 부숴버리고

    싶다는 하소연을 아내에게 한 적도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유추해볼 때, 그는 자신이 관심을 뒀던 경호원 일에

    다시 관심을 두기도 했었던 것으로 미루어 어느 시점 존 레논에게

    강한 관심과 열망을 가지게 되었고, 글로리아의 증언처럼

    결국 존 레논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숭배하는 영웅으로 생각해

    생활방식을 모방하는 듯하다 어느 순간 존경이 증오로 바뀌었다는

    것이 그가 존 레논을 살해한 가장 확실한 이유일 것입니다.

    (존 레논이 아들 숀을 키우기 위해 대중에서 멀어진 것처럼

    채프먼도 살인을 저지르기 1년 전, 퇴직하고 아내와

    조용히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채프먼은 결국 뉴욕으로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살인을 계획하며

    총을 구매해 다코타 아파트를 돌며 미리 범행지점까지

    정해놓으며 기회를 엿보다, 존 레논과 실제로 마주해

    사인을 받고 잠시 감명받는듯하다 결국 몇 시간이고

    집에 돌아올 존 레논을 기다리다 살해를 하게 됩니다.

     

    존 레논이 녹음 스튜디오로 향하고서 어째서 숙소로

    돌아가지 않은 체 계속해서 다코타 주변을 서성이며

    기다렸느냐는 질문에 마크 채프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나는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러지 않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는 오리가 겨울에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으며,

    나는 이것을 아는 게 필요했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 홀든과 택시기사와의

    대화 중, 뉴욕에서 자라왔던 홀든이 센트럴 파크 남쪽의 오리가 있는

    연못이 겨울이 되어 물이 얼면 오리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을 하는데

    마크 채프먼은 이를 인용해 말을 꾸민 것 같습니다)

    <마크 채프먼의 세월에 따른 머그샷, 그가 존 레논을 살해했을 때가 미국 나이로 고작 25살이었을 때이다>

     

    결국 20년간 가석방이 제한되는 형을 받은 그는 자신의 감방을 한동안

    J.D 샐린저의 책들로 도배해 '연구실'로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마크 채프먼의 가석방 시도

    그는 1987년 주간 피플지와의 인터뷰에서 살해대상 명단에

    폴 매카트니, 영화배우 조지 C 스코트, 하와이 주지사 조지 아리요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등이 있었다고 밝히며 또다시 사람들의 분노를 삽니다.

     

    이후 가석방 심사 신청 기간인 2000년부터 꾸준히 가석방 심사 신청을 한

    채프먼은 번번히 심사에서 기각되자 2008년 '내가 한 일은 부끄럽고 창피하다',

    '나는 이제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제

    살인자가 아닌 더 나은 누군가가 되고 싶다' 등 처음으로 존 레논에게

    사과한다는 말을 전하며 감정에 호소하지만 요코의 꾸준한 반대표에

    힘입어 역시 가석방 심사에서 기각되고 맙니다.

     

    2010년 6번째 가석방 심사에서 채프먼은 자포자기 한 듯 가석방 심사위원회

    인터뷰에서 쟈니 카슨과 리즈 테일러의 살해도 생각했었다는 망언을 해

    사법 당국의 '공공 안전상 위험 우려가 있다'라는 평가 탓에 역시 기각되고 맙니다.


     

    <교도서에서 잡역과 도서관 일을 하며 비교적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채프먼은 부인 글로리아와 특별시설에서 44시간 동안 함께 지낼 수 있는

    '가족 재상봉' 프로그램을 통해 계속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은 최근의 글로리아>

     

    <마크 채프먼이 1980년부터 수감되어 온 뉴욕의 아티카 교도소,

    아이러니하게도 아티카 교도소는 71년 죄수들의 기본권 보장을 원하는

    폭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악명높은 교도소 중 하나였는데

    폭동 때문에 교도관 11명을 포함해 43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자

    '아티카 교도소'라는 노래로 애도하던 이가 바로 존 레논이었다>

     

     

    애도

    존 레논의 사망 후 이틀도 채 안 돼 그의 시체를 비밀장례식에서 매장한 후

    힘겹게 추스른 요코가 그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호소를 하게 되고, 결국

    12월 14일 일요일 요코의 제안에 따라 10분간 전 세계의 라디오 방송국들이 방송을

    중지하고 그를 애도하였으며 센트럴 파크에는 십만여 명이 모여 마찬가지로 존 레논을 애도하였습니다.

     

    <1980년 12월 14일 일요일, 센트럴 파크에서 존 레논을 애도하는 군중>

     

     

    존 레논의 죽음에 슬퍼하던 사람들은, 아마 존 레논과

    함께하던 그들 자신의 시절을 상실한 듯한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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