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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와 부처의 얼굴에 대한 진실
    기묘한 이야기 2019. 8. 31. 10:00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예수와 부처의 얼굴상>

     

    인류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예수와 부처를 인간의 범주에 놓고 진행하겠습니다,

    앞으로의 내용은 모두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부처에 대한 각각의 개인적인 견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와 부처를 신성시하는 분들의 견해도 존중함을 미리 설명해 드립니다)인 예수와 부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얼굴상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변형이 있으며

    그들의 얼굴상은 '예술품'으로서가 아닌(일부 예술작품으로서 영향을 끼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마 인류사 중 유례없는 사례일 것입니다) '예배물'로 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사에 지워지지 않는 획을 긋게 된 예수와 부처,

    그들이 지닌 실제 얼굴의 특징조차 전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비교적 고대의 인물들이기 때문일까요?

    (예수와 부처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는 의견들을 기본적으로 배제하겠습니다)

     

     

    <좌: BC80년경, 실존했던 황제나 장군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로마의 조각상 / 우: AD 2세기경의 이집트 소년의 초상화>

     

    실제로 불상이 출현하게 되는 시기는, '고타마 싯다르타'(불교를 창시한 성자, 보통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처의 전신, 앞으로 단어가 가진 의미에 의한 혼돈을 피하고자

    '고타마 싯다르타'를 편의상 부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가 입멸 후 500년 무렵입니다.

     

    이처럼 입멸 후 오랫동안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까닭은,

    부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부처는 정신적으로만이 아닌 육체적으로도 신성시

    여겼기 때문에 감히 불상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싯다르타의 사후 긴 기간 동안 그의 형상을 딴 조형물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싯다르타 자신이 생전에

    자신의 사후, 절대로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우상숭배를

    걱정한 그의 부탁에 따른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에 대해서도 당시 이와 비슷한 입장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 종교가 될 때까지 예수의 조형작품은 카타콤의 엄격한

    규제하에 허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의 경우와는 약간 다르게 당시 예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새끼 양, 비둘기, 물고기, 포도나무, 조합문자 등을 예배용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예수를 물신적인 대상이 아닌 그의 정신에 입각한

    신앙의 입장을 고수하라는 뜻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3세기까지 예수를 조형예술로서 표현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위반이자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고대 교회와 교부들의 기본 입장이었으며,

    이 때문에 예수를 표현한 작품은 5세기 들어 기독교의 세력이 신장하면서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불교의 불상 전파도, 불상 조성을 금기시했던 기성 교단의 사상이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는 불상 예배를 해야 한다는 대승사상으로 전환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불상제작의 초기 그리스인들과 박트리아인들이 만든 불상,

    헤라클레스가 항상 '경호'하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

    <아이러니하게도 싯다르타는 자신이 처음 시도했던 수행법인 '고행'을 잘못된 수행법이라 생각하고 이를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아직 고행을 수행의 미덕으로 여기는 인도는 고행의 영향을 받은 듯한 마른 몸집의 부처상이 많다>

     

    <관상학적인 장점들을 모두 모은 부처상이 특징인 한국의 불상은, 불교가 전해 내려오던 당시 왕권 나라였기에,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왕과 부처를 동일시 취급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인하여 불상을 고민하는

    수행의 모습이 아닌 민중을 아우르는 온화한 표정과 풍채가 든든한 몸매로 제작되었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불상들 역시 대체로 온화한 표정, 든든한 풍채가 그 특징이다>

     

     

    <두라 유로포스의 세례단에 보존된 직접적으로 표현한 가장 오래된 예수의 초상화,

    AD 235년의 것으로 추정되며 예수를 턱수염이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좌: 성 캐더린 수도원이 소장한 예수의 초상화 / 우: 독특한 화가 엘 그레코의 예수 초상화>

     

    <예수의 얼굴을 정형화시키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기독교 미술가 워너 샐만(Warner Sallman)의 '예수의 얼굴',

    후에 북유럽의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백인으로 그려진 샐만의 예수 초상화는 5억 장 이상 만들어진다>

     

    <전형적인 이탈리아식의 화풍과 인물풍을 이용해 예수를 그린 대표적인 '예술작'인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예수와 부처의 실제 외향적 특징은 어떠했을까

    4 복음서에 외모, 체격, 기질 등과 관련한 아무 언급이 없는 예수는 외모나 체격에

    글로 내세울 만한 특이한 점이 하나도 없었거나 그러한 것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하등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 테고, 둘 다 맞는 말이 될 것입니다.

     

    다만, 사53:2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라고 쓰인 것을 보아 예수는 외모만으로 어떠한 성인의 모습을 품기엔 비교적 평범한,

    당시의 전형적인 유대인의 외모를 지녔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0년 3월 30일, 히스토리 채널서 방영된 '예수의 진짜 얼굴은'>

     

    예수의 실제 얼굴에 대한 의문점으로 시작된 가장 최근 이루어진 한 실험이

    미국의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서 2010년 부활절을 맞아

    2010년 3월 30일 방영한 'The Face of Jesus'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했을 때에 그 시신을 감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토리노의 수의'를 현재의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들이

    최첨단 프로그램을 이용해 실제 얼굴을 구현하였는데,

    수의 앞면과 뒷면에 남아 있는 피와 먼지, 물 자국들로

    예수의 인상을 추정해 예수의 얼굴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복원된 예수의 얼굴은 그동안 많은 화가의 초상화 탓에 인식되었던 영화배우 같은

    외모가 아니었으며 물론 북유럽인 같은 얼굴외형도, 푸른 눈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던, 당대의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들이 토리노의 수의를 통해

    복원시킨 거무스름한 피부에 약 176.8cm 키의 이 남자가 진짜 예수의 외향을 복원시킨 게 맞을까요?

     

    <공개와 동시에 엄청난 진위 논쟁을 몰고 왔던 '토리노의 수의'>

     

    예수의 성의로 불리는 '토리노의 수의'는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천으로 알려져

    기독교 최고의 성유물로 등극하며 이탈리아 토리노의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는 측의 사람들은 '토리노의 수의' 가 중세시대에 신앙의

    도움을 주려는 목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수의는 1988년 교황청에서 진위를 가리기 위해 샘플을 채취해

    세 군데의 실험실에 보내어 탄소 연대 측정실험을 의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 실험실 모두 해당 수의가 1260-1390년

    사이의 중세시대에 제작된 수의라는 실험결과를 통보하게 됩니다.

     

    이는 '토리노의 수의' 가 최초로 등장한 기록이 바로 중세시대인

    1357년 프랑스 동부의 리레 성당에서 처음 전시되었다는 점을

    진위 논쟁의 반대 측 사람들이 내세웠던 주장임을 고려하면

    교황청과 '토리노의 수의' 가 예수의 형상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여 진실로 믿고 있던 사람들은 수의가 여러 군데로 이동되는 과정 중에

    외부와의 접촉으로 말미암은 오염으로 탄소함량이 증가해 실험결과에

    수의의 시기가 '젊어' 졌으므로 탄소 연대 측정법의 한계와

    난점이 지닌 맹점으로 성급히 결론 내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실제 유대인들의 평균신장이 158cm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수의를 소유하고 있는 바티칸 교황청은 '누구나 이 천이 예수의 몸을 감았던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라며 수의의 진위보다는 믿음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BBC에서 방영한 '신의 아들' 시리즈에 나온, 1세기 유대인들의 두개골을 사용해 

    원한 예수 시대의 전형적인 유대인 모습 - 머리카락, 턱수염, 피부색 등은 이라크 북부의 한 사원서 발견된 예수상을

    토대로 제작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현재로선 예수의 실제 얼굴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정보를, 2008년 성탄절에

    한국에도 방영된 BBC의 특별 시리즈물인 'Son of God'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맨체스터대 연구팀은 역사 속에 실존인물로서의 예수를 그린

    '신의 아들' 프로그램을 위해, 이스라엘 예루살렘 부근서 도로공사 중

    발견된 1세기 유대인들의 두개골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를 보인

    것들을 선별해 첨단 법의학 기법과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이용해

    당시에 살던 유대인의 실제 얼굴을 복원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신의 아들'의 PD는 '예수의 실제 두개골을 복원한 것이 아니므로 예수의 얼굴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시 살던 실제 예수의 모습을 추정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아마 예수가 살았던 당시 유대인의 두개골을 이용해 복원한 이상, 맨체스터 대학팀이

    복원한 이 얼굴의 큰 틀에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16세 때 그려진 초상화로 알려진 사진>

     

    그렇다면 부처는 예수의 경우와 같이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외형적 특성은 무엇일까요?

     

    위 사진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싯다르타의 16세 때의

    초상화라고 알려지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비교적 세부적인 사항들까지도 같이 알려졌지만,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해당 사진은 한국의 무당들이 영험함을 가지고 있는 부처의 16세 때

    초상화로 인식하며 마치 달마의 그림처럼 즐겨 사용하는 사진입니다.

     

    사실 싯다르타 생전엔 '종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종이는 기원후 AD 105년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서

    그전에는 나무껍질이나 무명천 같은 곳에 그림을 그렸으며,

    무명천은 당시 화구인 먹의 번짐도가 심해 위와 같은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부루나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41세 때의 싯다르타>

     

    위의 사진은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소장 중이라고 알려진 초상화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싯다르타 생전의 10대 제자 가운데 하나였던

    (사실 예수와 부처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12 사도와 10대 제자가 있는데,

    그들은 예수와 부처의 '제자'라기 보다는 그들의 정신을 사모하여 따랐던

    '동반자'라고 보는 게 옳지만, 혼돈을 피하고자 편의상 '제자'라는 단어로 설명하겠습니다)

    부루나가, 싯다르타가 41세 때 그의 모습을 보며 직접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사진이야말로 정말 살아생전의 부처의 모습일까요?

     

    아쉽게도 앞서 설명했듯이 기원후에나 종이가 발명되었고, 그림의 상단에 적혀 있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는 한자로 보아 기원후 중국에서 그린 그림이거나

    그림의 위쪽에 가로가 아닌, 그림의 아래쪽에 낙관과 조화를 이루며 세로로 글을

    첨부하는 특징을 가진 중국 그림으로 '석가모니불'이라는 글은 후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위 사진은 아시아권, 특히 불교권인 나라들 사이에서는 중국 돈황에서 나온

    부처의 초상화로 영국의 '영국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으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국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맞습니다)

     

    사실 위의 사진은 20년도 더 전에 떠돌아다닌 것인데, 출처 설명의 부르나가

    싯다르타를 그렸다는 식의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인도에서 사용되는 붓다라는 용어는 석가모니(깨달아 입멸한 싯다르타를 뜻함)만

    칭하는 게 아니며, 불교 고유의 명사도 아닙니다.

     

    불교가 탄생하기 전에도 가장 거룩하고 이상적인 스승을 가리켜

    붓다라고 칭하였으며, 누구든지 깨닫고 훌륭한 자라면 붓다라고

    칭하였으며 마하비라교에서는 자신들의 교주를 붓다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싯다르타가 석가모니로 불리면서 진정한 붓다라 칭해졌지만,

    그 후에도 다른 종파에서는 자신들의 스승을 붓다라고 한 것입니다.

     

    거기다 경전 어디에도 부르나가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 없으며

    그 시절 스님들은 오로지 수행과 설법만을 하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인도의 아리아 계열에서 흔히 사용하던 소박한 장신구인 귀걸이를

    표현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복같이 보이는 상의와(싯다르타는 남루하고 남이 버린

    누더기를 짜깁기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인도와 네팔인의 외양으로도

    보이지 않는 얼굴 생김새는 싯다르타의 초상화라고 하기에는 많이 민망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부처의 얼굴 생김새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다행히도 우리는 앞서 BBC에서 '신의 아들' 프로그램을 위해 복원시켰던

    당시 시대의 유대인 얼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지금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 산 기슭의

    샤키야족이라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는데, 그래서 거의 순수혈통의

    아리안족인 싯다르타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키나 덩치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며 외모와 피부도 좀 더 백인에 가까웠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을 이용해 일본의 ATOMOS, 미국의 ublaq,

    한국의 UBIQKOREA사가 한미일 합작 브랜드로 이러한 신발을 출시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일어났다>

     

     

    예수와 부처의 실제 얼굴에 대해 알고자 했던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예수와 부처가 지니고 있었던 '사상' 과 '철학'은 분명 그 시대에 직접

    그들의 가르침과 마주했던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들이 수행하여 얻은

    근본적인 정신을 사모했던 것처럼 그들의 사후에도 우리는 어떠한

    '우상숭배' 형식이 아닌 '정신'만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예수와 부처의 얼굴'이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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