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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시 연쇄살인사건(살인의추억) 일지 - 4부
    기묘한 이야기 2019. 9. 10. 19:00

     

    "말해, 니가 죽였다고 말해

     말해, 전부 말하란 말이야 이 새끼야!"

     

     

     

     

    ·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수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의 용의자였던 명군과 정군이다

     

     

    - 당시 수원경찰서 강력반 형사였던 조광식씨의 주장

    - 수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이란?

      1987년 12월 24일 목요일 집에서 엄마와 사소한 말다툼 끝에 '죽어도 집에 안 들어온다'라고 외치며

      뛰쳐나간 김미순양(당시 19세)이, 다음 해 1월 4일 싸늘한 주검으로 화서역 논바닥에서 발견된 안타까운 사건

    -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화성 연쇄살인사건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측되는 사건이며, 피해자는 엎드린 채

      두 손이 스타킹으로 묶여 있고 하의가 완전히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으며 입에는 팬티로

      재갈이 물리고 성폭행 후 스타킹으로 목 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
    -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모발 및 음모 몇 점이 채취되어

      검사한 결과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과 동일한 B형으로 감정됨
    - 피해자 김미순양은 자신의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던 수원시 화서동 193번지 논바닥에서 범행 당함

    - 시신 부검결과 12월 24일 밤 11시에서 다음날 새벽 2시 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확인됨

    - 당시 수사에 투입돼 현장 주변을 탐문하던 조광식 형사는 한 주민에 의해 동네 불량배였던 A군(당시 17세)이

      친구들과 현장 인근을 배회하며 본드를 흡입하곤 한다는 제보를 받고 A군을 조사하게 됨

    - A군은 사건 당시 저녁 9시가 지난 무렵, 현장에서 명군과 정군이 논바닥 쪽에서 불을 피우며 놀았다고 진술

    - 이에 명군으로부터 대질결과 사실이라는 대답을 얻은 조광식 형사는 나머지 한 명인 정군의 소재파악에 나섬

    - 본래 현장에서 300m 거리에 살고 있던 정군은 수사가 시작되기 전인

      12월 29일부터 용인에 있는 외숙모댁에 가있는 것으로 파악됨

    - 이때, 사건발생 이후 갑자기 사라졌던 또 다른 동네 불량배이자 명군의

      친구인 B군(당시 18세)을 조사하던 중 결정적인 증언을 얻게 됨

    - B군의 증언에 따르면, 명군이 12월 28일 밤 10시경 화서동의 오락실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 수원을 떠나

      도망가야겠으니 절대 얘기하면 안 된다, 내가 입던 빨간 점퍼는 네가 가져가 입어라'라고 말했다는 것

    - 이러한 증언의 사실 확인을 하던 조광식 형사는 명군에게 정군의 점퍼를 B군이

      입으면 범인으로 몰려 자신이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을 들음

    - 이후 정군을 불러들여 명군과 따로 분리해 자술서를 받은 결과, 둘이 그린 사건 현장 약도가

      김미순양이 피살된 곳과 일치했으며 범행방법과 과정에 대해 공통된 진술을 하는 것으로 드러남

    - 이들은 귀가하는 피해자를 칼로 위협, 입을 막고 각목으로 때린 뒤 성폭행한 후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이후 시신을 짚더미에 숨겨 놓고 도주했다고 진술

    - 또, 피해자가 당시 입고 있던 옷과 운동화에 대해서도 같은 진술을 함

    - 하지만, 구체적인 범행과정의 진술에서 서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함

    - 정군은 목을 조르고 강간한 것도 명군이며, 자신도

      강간하려했으나 기분이 좋지 않아 못했다고 진술

    - 명군은 정군이 목을 졸랐다고 진술

    - 자백을 받은 수사팀은 증거확보를 위해 둘을 추궁한 끝에 피해자를 위협하는 데

      사용했던 칼과 스타킹을 자른 칼을 각각 정군의 외숙모 집과 정군의 집 근처에서 발견

    - 수사팀은 쐐기를 박기 위해 더욱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 당시 피해자가 차고 있던 시계의 행방을 찾고자 함

    - 조광식 형사는 이와 관련해 명군에게 캐묻기 시작

    - 그러자 명군은 '증거물을 찾으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음

    - 한편, 사건 현장 근처인 화서동 숙지산 중턱의 땅굴에 대해, 범행 후

      숨어서 먹고 자고 본드도 마시고 그러기 위해 파놓은 것이라는 진술확보

    - 이들은 지나가는 여자를 상대로 범행했으며, 정남면 쪽에서 한 명을 죽였다는 진술도 추가확보하게 됨

    - 화서동에 살면서 화성까지 어떻게 갔느냐는 질문에, 경찰의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해 기찻길을 따라가서 범행 후 다시 기찻길로 되돌아왔다고 진술

    - 이러한 진술을 들으며 조광식 형사는 이들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라고 의심하게 됨

    - 정군은 조광식 형사를 붙들고 '교도소 가면 어떻게 돼요?'라고

      물었고, 명군은 '그 시계 안 찾으면 안 되나요?'라고 했다고 함

    - 피해자의 시계가 사건의 가장 큰 증거물이 될 것으로 판단한 수사팀은

      명군을 추궁해 수원시청 근처 88공원에 시계를 묻었다는 진술을 확보

    - 이때, 명군이 말한 곳에서 시계를 찾던 중 수갑을 찬 상태로 명군이 산 밑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쫓아간 형사가 명군의 앞을 가로막은 후 잡던 중 두 손으로 밀치다 그만 명군이

      꽁꽁 얼어붙은 울퉁불퉁한 땅 위에 후두부를 부딪치며 나자빠지는 일이 생김

    - 이로 인해 명군은 이날 밤부터 유치장에서 심하게 앓기 시작했지만, 수사팀은

      1988년 1월 12일 아침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명군을 방치하고 맘

    - 그 결과 명군은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언론을

      통해 청소년에 대한 고문, 가혹수사로 대중에 알려지게 됨

    - 이러한 소식은 사회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결국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직위해제되기에 이르렀으며 조광식 형사를 포함한 3명의 형사 역시 실형에 처하게 됨

     

     

    - 당시 명군과 정군이 고문으로 허위자백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자 조광식 형사는 이를 강하게 부정했으며,

      명군의 부검을 시행한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는 폭행으로 인한 사망이 아닌 것 같다는 소견을 내놓기도 함

    - 당시 명군을 붙잡을 때 협조했다는 건설회사 간부의 증언도 확보하지만, 당시 제5공화국 말기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의 고문치사로 사망한 박종철씨의 고문치사 사건이 있은 지 1년이 되던 날로

      인권침해와 고문경찰에 대해 대중의 분노가 무르익던 시기였고, 명군이 37일 동안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다

      사망하게 됨으로써 조광식 형사 등은 악질 고문 수사관이라는 말을 듣게 됨

     

    - 당시 뇌사상태에 빠진 명군의 부모가 장기기증을 결심하면서 국내에 처음으로 장기이식수술

      가운데 가장 까다로운 간장이식이 이루어져, 뇌사가 사망기준을 사실상 인정하며 심장사를

      사망의 기준으로 삼고 있던 당시의 현행법체계에 뇌사를 사망의 기준으로 삼은 첫 케이스가 됨

     

     

     

     

     

    - 조광식 형사는 당시 언론과 검찰이 여론에 휩쓸린 나머지 마치 무고한 청소년을 상대로 가혹행위를 하여

      허위자백을 받아냈다고 수사팀을 매도했지만,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니며 명군과 정군의 범죄지능은 남달랐고

      현장 지리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완전범죄를 노릴 만했다고 주장

    - 또, 당시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대변과 모발, 음모에서 추출된 혈액형이 B형이었는데

      명군과 정군의 혈액형도 B형이었고, 이들은 주민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으며 야산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본드 흡입 등을 하며 생활했다고 주장

    - 당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맡던 대표적인 형사 중 하나였던 하승균 형사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당시 화성시 태안읍과 정남면 일대에서 이른바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르다

      수사를 피해 수원 화서동에서 김미순양을 살해한 것이며, 범인은 수원거주자라고 확신함

    - 한편, 고문치사를 받아 징역살이하던 조광식 형사는 재소자

      C씨로부터 명군과 정군이 범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함

    - C씨는 당시 1987년 12월 중순에 발생한 떼강도 사건으로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어있었는데, 이때 정군과 함께 미결수 방인 1동상 18방에 같이 있었다고 함

    - 당시 이 방에서 18명의 미결수 앞에서 정군이 명군과 함께 여고생을 흉기로 위협, 논바닥으로 유인해 강간한뒤

      스타킹으로 목을 조르고 각목으로 머리를 때렸으며 피묻은 각목과 팬티는 야산에서 태워버렸다고 털어났다고 함

    - 이런 말을 들은 재소자들은 형사들이 폭행과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우기라고 코치해주었다고 함

    - 그리하여 정군이 검찰조사과정에서 돌연 범행사실을 부인해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함

    - 한편, 당시 명군과 정군에 대한 수사와 구속까지 열흘 동안 명군을 고문 치사했다는 혐의로 2년 6개월의 실형을 산

      조광식 형사는 11년간 지켜온 경찰 신분을 박탈당하고 경비지도자로 변신해 강연을 다니며 지내다 당시의 수사자료

      등을 토대로 한 수기를 내며 명군과 정군을 김미정양 사건과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관여된 범인으로 지목

    - 결국 수원 여고생 김미정양의 강간 살인사건은 미제로 남게 됨

    - 후일담으로 기소유예 석방된 해 3월 2일에 입대한 정군이 9월 초 일병 정기 휴가를 나오자

      거짓말처럼 9월 7일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1990년 11월 15일까지 범행이 없었던 점,

      그리고 당시 범인을 목격한 버스 기사가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갸름한 얼굴과 170cm 안팎의 키,

      어깨가 구부정한 뒷모습을 증언하며 범인과 정군이 외형이 일치하고 이후 살인사건에 정군이

      관여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막연한 정황상의 증거 외에 정확한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오지는 않음

     

     

    · 당시 직접 화성을 취재했던 소설가 이수광씨의 상반된 증언

     

     

    - 김미정양의 사건을 취재하던 중, 여러 사람과의 전화를 통해서 수원시

      세류동의 다방에서 만난 한 경찰관으로부터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는 조건하에 사건의 내막을 상세하게 듣게 됨

    - 당시 수원 경찰은 화서역 인근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화성과 지척지간임에도 불구,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포함시키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사하기로 하고 수원 정자동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수사에 나섬

    - 전통적인 수사방법인 초동수사에 임해 피해자 주변과 현장 주변 우범자들에 대해 광범위한 탐문수사를 하던

      형사들은, 주민들에 의해 본드를 흡입하는 등 평소 행실이 좋지 않다는 제보를 받고 모군을 용의자로 지목

    - 모군은 경찰의 추궁이 심해지자 현장 부근에서 명군과 친구들을 보았다고 자백

    - 이에 1월 6일 오후 2시, 명군은 화서동 자택에서 다짜고짜 연행됨

    - 명군의 부친(당시 47세)은 인근 공장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다 지난밤 야간근무를 하고

      집에서 잠을 자던 중, 느닷없이 사복경찰들이 명군을 차로 끌고 가자 자신의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묻자 형사들은 조사할 것이 있다는 말만 하고는 명군을 끌고 감

    - 다음날 정군도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조사는 수사본부가 아닌 수원경찰서 형사계에서 시작됨

    - 1월 7일 저녁 7시경, 정군을 연행하자마자 지하실로 끌고 가 신문지로 얼굴을 가린 뒤 구타를 가함

    - 이는 형사들이 취조도 하지 않고 용의자들을 공포에 질리게 한 뒤 자백을 받으려는 방법

    - 밤 9시경, 정모군에 대한 고문을 끝낸 뒤 형사들은 회유책으로 다방에 가서 차를 마시게 하고

      맥주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먹이나 정모군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내세우며 범행을 부인

    - 그러자 형사들은 정모군을 다시 수원경찰서 지하실로 데리고 가 수갑을

      채운체 포승줄로 묶은 뒤 '공중 비행기'를 태워 정모군은 술을 모두 토하고 맘

    - 밤 10시경, 정모군이 견디지 못하고 형사들이 불러주는 대로 자백을 하기 시작

    - 그리하여 '저와 명노진군 등 3명이 범행했는데 김미정양의 입을 막고 칼을 목에 들이댄 뒤에

      현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김미정양이 도망을 치자 각목으로 머리를 때려서 실신시킨

      뒤에 폭행하고 명군이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라는 자술서가 만들어짐

    - 형사들은 정군이 범행에 사용했다는 칼에 대해 추궁을 하기 시작했고,

      공포에 질린 정군은 집 근처에 있는 방죽에 칼을 버렸다고 말함

    - 이에 형사들은 밤 11시경 칼을 찾으러 갔으나 어두워서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으며,

      다음날 다시 칼을 찾으러 갔으나 명군과 정군이 고문이 무서워 마구잡이로 자백한 것이였기

      때문에 역시 칼은 찾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온종일 허탕을 친 형사들의 분노를 사게 됨

    - 한편, 1월 7일 저녁 8시경 명군은 양손을 뒤로하여 수갑이 채워진 체 형사들에게 가슴과 얼굴을 무차별 가격당함

    - 고문이 끝난 후, 2층 숙직실에서 명군은 눈물을 흘리며 자술서를 작성

    - '제가 환각제를 탄 술을 김미정에게 먹이고 옷을 벗긴 뒤에

      강간을 했습니다.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은 정군이 했습니다.'

    - 마찬가지로 형사들의 추궁에 명군은 사건에 쓰였던 칼을 롤러 스케이트장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진술

    - 다음날 명군과 함께 롤러스케이트장을 찾은 형사들은 역시 칼을 발견하지 못함

    - 윽박지르는 형사들에게 명군은 친구 권군의 집에 숨겼다고 말하나, 명군을

      끌고간 형사들은 권군의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칼을 발견하지 못하며 분노

    - 공포에 질린 명군은 다시 수원시청 앞 야산에 묻었다고 말하고 형사들과 향하나,

      역시 칼을 찾는 데 실패한 형사들이 현장에서 도주를 시도한 명군에게 더욱 분노해

      어린놈이 거짓말을 한다면서 주먹으로 폭행함과 동시에 몽둥이로 머리를 가격

     

     

    - 이때 명군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고, 형사들은 수원경찰서로

      다시 끌고 가 얼굴과 가슴 등을 구둣발로 마구 짓밟음

    - 또, 명군이 도망을 간다고 발바닥을 몽둥이질하는 등 폭행이 심해지자 명군은 그날 밤부터 끙끙 앓기 시작

    - 밤새 신음을 하며 앓다가 구토를 하던 명군은 다음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형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조사실로 끌려감

    - 당시 명군의 손발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는데, 형사들은 일단 명군과 정군을

      교회에 침입해 현금 몇천 원을 훔친 것을 빌미로 특수절도죄로 구속영장을 청구해 유치장에 수감시킴

    - 1월 10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한 채 거의 굶은 상태로 누워서 조사를 받던 명군은

      조사가 끝났을 때 즈음엔 눈에 초점이 없고 의식이 가물가물했으며, 밤이 되자 더욱

      악화되어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경련증세를 일으키기 시작

    - 그러나 유치장을 담당하던 의경으로부터 질서를 잡는다는 명목하에 기합을 받기까지 함

    - 1월 12일 아침, 명군은 아침밥을 먹을 수도 없는 상태였는데 결국 유치장을 감시하는 의경에게

      폭언을 듣던 와중 의식을 잃으나 그 후 한참이나 방치된 후 동료 유치인들이 이상하다고 의경에게

      알려 의경이 명군의 상태를 수사과에 보고해 형사들이 황급히 수원 도립병원으로 옮기게 됨

    - 그러나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진 명군은 경찰에 의해 수원 도립병원에서 경찰병원으로, 경찰병원에서

      한양대 병원으로 옮겨진 끝에 뇌사 상태에 빠져 한양대 병원으로 옮겨진 지 37일 만에 장기기증을 한 뒤 숨이 끊어짐

    - 사인은 외상성 뇌출혈, 머리를 맞아서 뇌에 출혈이 생긴 것으로 밝혀짐

    - 한편, 검찰은 1월 9일 이미 명군이 손발이 붓고 다리를 저는 등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밝혀냄

     

     

    - 당시 명군의 부모는 아들이 연행되자마자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면회를 요구했으나

      경찰로부터 허락받지 못했으며, 경찰서 후문을 배회하다 수원시청 앞 야산에서

      매를 맞고 형사들에게 끌려 들어가는 아들을 보기도 했다고 함

    - 1월 12일에는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누군가에게 업혀서 나가는

      아들을 보기도 하나 당시 형사들은 명군이 아니라고 했다고 함

    - 결국 수사본부에 배치되어 있던 많은 형사가 상부의 조사를 받고 좌천되거나

      본서로 돌아감으로써 사건은 흐지부지되며 미궁에 빠지게 됨

     

     

    ·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의 범인이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인 정군이다

     

     

     

    - 조광식 형사의 수기가 대중에 알려진 후 2007년 12월 25일 두 명의 초등학생이 납치, 살해되면서 등장하게 된 가설

    - 2007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양시에서 이혜진양(당시 10세), 우예슬양(당시 8세)가 동시에

      납치된 뒤 다음 해 3월 11일 경기도 수원시 부근 칠보산 일대에서 이혜진양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3월 16일 유력한 용의자 정성현(당시 38세)이 검거되어 17일 범행을 자백하며 18일 경기도

      시흥시 군자천에서 토막 난 우예슬양의 시신 일부가 발견

    - 정성현은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의 따돌림,

      그리고 여성들로부터의 배신과 혐오증으로 인해 범행을 계획했다고 진술

    - 안양시 자취방에 은둔하던 정성현은 이혜진양과 우예슬양에게 안양시내를

      구경시켜준다고 유인해 성폭행한 뒤 의왕고색간 일반국도 야산에 암매장 함

    - 이어 군포 부녀자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자백을 하며 6월 18일 안양 초등생과 군포 부녀자 정덕순씨(당시 44세) 

      총 3명을 토막 살해한 범인 정성현에게 수원지방법원은 사형을 선고, 정성현의 판결 불복에 이은 고등법원

      항소에도 10월 17일 서울고법에서 마찬가지로 사형 선고, 또다시 정성현의 판결 불복에 이은 대법원 상고에서

      다음해 2월 26일 대법원에서도 상고를 기각하며 사형을 선한 원심이 확정됨

    - 한편, 화성 연쇄살인사건 당시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다 무혐의로

      풀려난 정씨가 정성현과 이니셜이 같고 나이대가 맞는다는 점, 두 사건 모두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발발했다는 점, 정성현이 2002년부터 안양에 거주했기 때문에 화성과 수원 근처에 있었을 가능성을

      근거로 정성현=정군이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하기 시작함

    - 그러나 판이하게 다른 범행 수법, 서로 다른 생년(정성현은 1969년생, 정군은 1968년생),

      후에 정성현의 체액을 검출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인해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남

     

     

    ·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독살당했다

     

     

    - 1991년 우연히 화성사건 기사를 접한 뒤 사건의 진상 수집에 나섰던 김해운씨의 주장

    - 당시 화성군 태안읍에 있는 농장에서 근무하다 자신과 부인의 치킨집에서 닭을 잡아 팔던

      김종경씨를 조사하던 중 그의 난폭한 성격과 주변인들의 증언 등을 통해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집중적으로 조사하던 김해운씨는, 평균 한 달 간격으로 발생하던 사건이 김씨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약 4개월간 주춤하는 것을 보고 확신을 하게 됨

    - 또, 당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해마다 사건이 발생했는데 유독 1989년 한해만 유일하게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을 김씨가족이 1989년 수원으로 이사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

    - 김씨가 수원시 세류동에서 약 4개월간 살던 중인 1989년 7월 3일에 피해자 여고생의 유방과

      음부를 도려낸 '수원 오목천 살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오목천이라면 수원 시내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세류동으로 거리상으로도 4km밖에 안 되므로 김씨가 범인이라고 주장

    - 당시 MBC 'PD 수첩'에서 김해운씨와 그가 지목한 용의자 김씨를 취재한 내용을 방송하기도 함

    - 김해운씨는 김씨의 부인을 만나 당신의 남편이 연쇄살인범인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녀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주장

    - 이후, 증거가 될 만한 자료를 달라는 요구에 당시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의

      현상금이었던 5천만 원을 준비해 다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함

    - 그리고 '내 남편이 잡혀가면 사형을 당할 거야, 내가 사실대로 말했다가 증거를 못 찾아내고

      풀려나면 남편이 나를 죽일 것이다, 내 남편이 범인으로 밝혀지면 우리도 범인의 가족인데

      정부에서 우리 가족도 다 죽일 거야'라는 말을 당시 부인의 친구였던 김해운씨의 정보원에게 했다고 주장

    - 이외에도 김해운씨는 당시 농장에서 근무하다 치킨집에서 일하며 방치되었던 축사에서 김씨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캄캄한 곳에서 옷가지를 세탁하는 것을 보았다고 부인이 말했다고 주장

    - 한편, 김해운씨가 모은 증거들과 김씨에 대한 용의점들을 제보받은 서대문 경찰서 강력계는

      그에게 강력게 형사들 앞에서 김씨에 대해 브리핑을 하도록 하였고 김해운씨의 브리핑을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판단한 형사들이 김씨를 연행해 조사하기 시작

    - 조사를 받던 중 김씨는 거짓말 탐지기에서 양성반응을 보였고, 당시 사건 총 책임자였던

      정반장이 변호사 입회 아래 김씨의 범행 자백을 받아내며 사건은 급물살을 타게 됨

    - 또, 김씨는 자백서에 '위에서 제가 쓴 내용은 누구에게 강요를 받아서 쓴 것이 아니고,

      본인인 제가 잘못한 점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 적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처자식(처1 자식3명)을 저의 잘못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잘못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감옥으로 가도 한 점 억울함이 없음을 자복 합니다'라고 씀

     

     

    - 이렇게 미제사건이 해결되는가 싶었으나 1992년 1월 증거불충분으로 김씨가 풀려나게 되었고,

      김해운씨는 당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관할지구의 사건을 서대문구 강력계가 해결할 것 같자

      기자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심령술사로 비하하며 꿈속에서 김씨가 범인이라는 계시를 받고

      제보한 것을 서대문구 강력계가 당시 관할서에서 무혐의 처리한 김씨를 다시 조사한다고

      부정적으로 보도하며 결과적으로 김씨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외압을 행사했다고 주장

     

     

    - 이후에도 김씨의 행적을 좇던 김해운씨는 1997년 2월 10일, 김씨의 지인으로부터

      김씨의 부인이 김씨를 독살한 것 같다는 증언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주장

    - 김씨의 사망 전날 김씨의 지인은 부엌 도마 위에 가루약 같은 것을 가리켜 무슨 약이냐고 묻자

      술 끊는 약이고 그것을 김씨에게 먹이려고 그런다는 부인의 말을 들었다고 함

    - 그리고 다음날 새벽 6시경, 김씨의 부인으로부터 급히 와

      달라는 전화를 받고 집에 찾아가자 김씨가 죽어 있었다고 함

     

    <김씨의 지인이 직접 재연한 사망 당시의 김씨모습>

     

    - 김해운씨는 김씨의 부인이 1989년부터 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평소 괴팍하고 거칠기로

      소문난 김씨가 그러한 아내를 그저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던 데는 당시 자신의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행을 부인에게 노출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

    - 결국, 부인이 자신의 간통사실과 남편의 범행사실, 그리고 모처(당시 김씨를 타 관활구에서

      잡아들이자 위기를 느껴 언론플레이를 했던 해당 관할구)의 사주를 받고 남편을 독살했다는 것

    - 김해운씨는 또, 독극물에 의한 사망은 대부분 토하게 돼 있으므로 침대 시트에 김씨의 위액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흔적도 없었으므로 현장정리와 새 침대 시트를 까는 데 있어 공범이

      있었을 것이며 독살을 사주한 모처의 힘에 의해 부검 또한 흐지부지 넘어갔다고 주장

    - 김해운씨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들을 담은 책을 출판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고소당하지 않은 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

     

     

    · 김해운씨에 대한 소설가 이수광씨의 증언, 그리고 또 다른 사실들

     

     

    - 1989년 12월 초순, 당시 강화도에 살고 있었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고 함

    - 전화를 건 사람은 김해운씨로, 자신을 심령과학자 김해운이라고 소개했다고 함

    - 당시 이수광씨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설로 내며 자신과 관련한 많은 기사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신설하며 해당 사건을 주제로 다룰 때 사건의 개요와

      원인에 대해 담당 작가에게 많은 조언을 하며 대중들에게 제법 알려지게 되었고, 김해운씨의 심령과학자라는

      말에 화성을 취재하며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기 때문에 반갑지 않았으며 끔찍한 화성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제보가 있다는 김해운씨의 말에 수사본부에 알리라고 말함

    - 또, 당시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자신의 추리대로 하면 범인을 잡으리라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경찰이 믿지 않아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김해운씨에게 거부감을 느낌

    - 하지만, 김해운씨의 간청에 결국 신촌에서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됨

    - 자신의 직업이 재단사이며 미국에 사는 재미교포라고 밝힌 김해운씨는,

      이수광씨에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함

    - 이에 호기심을 느껴 묻는 이수광씨에게 김해운씨는 자신의 꿈속에 손 하나와 하얀 봉투가 나왔는데,

      그 봉투에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 김ㅇㅇ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씌어 있었다고 말함

    - 아연실색하여 김해운씨를 쳐다보는 이수광씨에게 김해운씨는 이를 계시로 알고 미국에서 서울로 와

      서울의 한 파출소에 이야기해서 김ㅇㅇ라는 이름이 있는지 컴퓨터로 조회하게 되었고, 화성에 이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 명이 나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정남면 관항리에 사는 것을 알아냈다고 함

    - 그리고 나름의 조사 결과 정남면 면 소재지에서 닭을 잡아 파는 사람인데 성격이 난폭해 부인과

      자주 싸우고 이웃과도 싸워서 평판이 좋지 않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 기동성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됨

    - 이를 듣고 자신이 생각한 범인상과 들어맞자 이수광씨는 김해운씨에게 구체적인 증거를 묻게 됨

    - 그러자 김해운씨는 자신은 심령과학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지정한 곳을 금속탐지기로

      조사하면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홍진영양과 이계숙양이 살해된

      논바닥 근처의 개울둑에 범인이 흉기를 버렸다고 말함

    - 하지만, 이수광씨의 개울 이름을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이수광씨는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을 보였고 이에 김해운씨는 서류봉투 속에서 B5로 복사한 내용물을 꺼내 이수광씨에게 보여줌

    - 그것은 100여 매 정도의 조사내용을 담은 것이엇지만, 내용 모두가

      당시 신문기사 수준으로 특별할 것이 없자 이수광씨는 더욱 실망하게 됨

    - 이어 화성에서 같이 조사하자는 김해운씨의 제안을 이수광씨가 거부하자

      김해운씨는 금속탐지기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였고,

      이수광씨는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보라고 말함

    - 그리고 사양하는데도 불구, 김해운씨는 이수광씨에게 자신의 사건조사물을 복사해 주고 헤어지게 됨

    - 이후에 이수광씨와 친분이 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최영규 박사에게 김해운씨가 이수광씨가

      보냈다고 하면서 찾아와 금속탐지기로 범인이 버린 흉기를 찾자고 제안하나 심령과학자라고

      소개하는 김해운씨를 불신한 최영규 박사가 이를 거절함

    - 1여 년 후, 김해운씨가 이수광씨에게 다시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왔고 이를 거절하자

      한국에 미스터리클럽 같은 것이 없느냐는 말에 이수광씨는 친분이 있던 한국미스터리클럽

      부회장 우씨(당시 30대)가 생각나 그의 전화번호를 알려줌

    - 얼마후, 이수광씨는 김해운씨와 의기투합한 우씨가 자신과 친분이 있던 서대문 경찰서

      강력계 형사를 소개해주기에 이르렀고 김해운씨의 브리핑을 받은 서대문 강력계는

      김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48시간이 넘도록 가혹수사를 하며 자백을 받아냄

    - 가혹수사를 받던 김씨는 거짓말 탐지기에서 51개 항목 중 사건과 관련된 17개 항목에서

      양성반응을 드러냈고 홍진영양과 이계숙양의 범행에 대해 자백하기에 이르지만, 변호인이

      입회하자 경찰이 가혹수사를 해 자백했다고 폭로하기에 이름

    - 결국, 서대문 경찰서의 구속영장 청구에 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음

    - 김씨가 석방되자 신문과 방송은 서대문 경찰의 가혹수사와 김해운씨의 제보에 이르는 상황들을

      기사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어머니, 저는 결백합니다. 경찰이 나를 늘 감시하고 있어서 언제 다시

      잡혀갈지 모릅니다. 내가 억울하게 죽더라도 반드시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혀주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김씨가 자살을 기도하며 세간의 화제를 부름

    - 당시 김씨는 유서를 써놓고 부엌칼로 복부를 20센티미터가량 찔러 자살을 기도하며 한 달간 입원하게 됨

    - 한편, 김씨는 1993년 김해운씨의 제보로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돼 7월 15일까지

      3회에 걸쳐 석방과 연행을 반복하는 불법연행과 불법구금을 당했다고 함

    - 그전에도 용의 선상에 있던 김씨는 1991년 8월에 화성수사본부인 경기도경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난 뒤에도 6개월 동안 경기도경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고 함

    - 이후 김씨의 변호인은 국가를 상대로 가혹수사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승소(3천 8백만원 지급판결)하게 되었고, 서대문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은 파문당하기에 이름

    - 이어 국가가 구상권을 청구하며 형사들이 김씨가 국가에 배상한 손해배상금을 국가에 갚아야 하기에 이름

     

     

    -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씨가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사관들로부터

      이틀 동안 3번에 걸쳐 석방과 연행을 반복하다 자백을 받아 검찰에 송치했다가 검찰로부터

      무혐의로 풀려나게 됐으며, 이후에도 수사관들로부터 1달 동안 감시를 받았다고 함

    - 이후 김씨는 사람을 보면 형사들이 온다며 무서워하고, 선풍기와 같은 가재도구를

      보고 형사처럼 이야기하는 등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며 자포자기한 상태로 밥을

      먹지 않고 15일씩 내리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함

    - 결국 김씨는 1993년 7월경 무혐의로 풀려난 뒤 후유증을 앓아오다 1993년 자살기도,

      그리고 1997년 2월 10일 46세의 나이에 잠자던 상태 그대로 죽음에 이르게 됐다고 함

    - 이후 김해운씨는 김씨의 부인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인

      김씨를 독살했다는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수기를 출판하게 됨

     

     

     

    - 이에 김씨의 부인은 김해운씨의 저서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김해운씨가 만든 인터넷 카페에 대해 변호사에게 상담하기에 이름

     

     

     

    - 결국 김해운씨의 저서와 카페의 일부 글들이 제재받기도 하지만, 김해운씨가 재미교포이며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법적제재나 처벌이 까다로워 사실상 죄를 묻기가 어렵다고 함

    - MBC '히스토리 후'의 제작진은 김해운씨와 어렵사리 메일을 주고받으나 끝내 취재를 거부당함

    - 한편, 이수광씨의 수기에서 김해운씨가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을 안 김해운씨는 '당시에 내가 아무리

      모르기로서니 무명작가에게 탐지기 작업을 부탁해요? 정말 그랬습니까? 내가요? 그리고  당신이 소아마비

      1급 장애자 인줄 알았었다면 나는 당신을 신촌으로 불러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다리를 많이 저시는걸 보고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내가 이수광씨에게 기억이 나는 것은 그가 다리를 심하게 저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라는 것 밖에 없는데 13년전 일을 어찌 그렇게 소상하게 안단 말입니까?'라고 코멘트를 남김

    - 2005년 이수광씨는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기를 공개하던 중 당시

      서대문 경찰서 강력계에서 근무하다 파면당한 한 형사의 전화를 받게 됨

    - 그는 자신도 그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라고 말했으나 이수광씨는 구속영장 없이 김씨를

      48시간 넘게 조사하여 자백을 받아낸 것이 사실이므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함

     

     

    ·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그리고 3대 미제사건 중 하나인 화성 연쇄살인사건.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그때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대한민국 사상 최악의 살인마인 유영철의 말마따나 연쇄살인마는

    살인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죽었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인 걸까요?

     

     

    혹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이미 사지가 썩어 죽은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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