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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기괴]한국의 다양한 미제사건 정리 - 1부
    기묘한 이야기 2019. 9. 7. 19:00

     

    1986년 9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서 하의가 벗겨진 채 목이 졸려 살해된 71세 노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곳에 피해자를 기리는 것이 아닌, 피의자를 저주하는 허수아비가 세워지게 됩니다.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사건 초기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는 간첩의 소행으로 추정되어 당시 잔학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치던 공안경찰 이근안이 파견되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연인원 205만 명의 경찰과 130여 명의 형사가 투입되었으며 3,000여 명의 용의자와 참고인 수사,

    40,116명의 지문대조, 507명의 유전자 DNA 분석, 180명의 모발감정이 이루어지는 등 국내

    살인 사건 수사 분야에서 최대 인력 동원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점쟁이의 말마따나 경찰서

    정문 위치를 옮기는 촌극을 벌이기까지 해야 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이처럼 수많은 경찰력이 투입되며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기록에만 캐비닛 5개 분량이

    나왔지만, 공소시효 15년이 지나도록 해결하지 못해 결국 2006년 9월 19일 영구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던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그날의 범인은 과연 어디에 있던 걸까요.

     

    *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사건개요는 당시 사건들을 직접 취재했던 소설가

      이수광씨의 저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내용을 대부분 인용한 것임을 알려 드리며,

      사건과 관련한 묘사와 시신을 포함한 사진들이 불쾌할 수 있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또, 이는 사건과 관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절대 아닌,

      당시 사건의 악랄한 범행성을 알리기 위함임을 사전에 알려 드립니다.

     

      한편, 당시의 신문보도는 취재원이 누구냐에 따라 내용이 다를 수 있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취재 과정 중 수사 경찰에게 잘못된 정보를 받았을 수도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수광씨의 취재를 기반으로 사건개요가 쓰인 것임을 밝힙니다.

     

     

    제1차 사건


    1986년 9월 14일, 화성군 정남면 백리의 밭에서 재배한 채소들을 팔기 위해 수원 시내로
    갔다가 태안읍 안녕리에 있는 시집간 딸의 집에서 잠을 잔 이완임 할머니(당시 71세)는
    9월 15일 새벽 6시에 딸이 한사코 아침을 먹고 가라는 것을 뿌리친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특히 가을에 일거리가 많던 시골이었기에 걸음을 재촉했던 이완임 할머니는, 실종
    닷새째가 되는 9월 19일 오후 2시경 거주지인 정남면 백리에서 30분 거리이자 딸의
    집에서 10분쯤 떨어진 곳인 안녕리 길옆 목초밭의 우거진 풀들 사이에서 소에게 먹일
    풀을 베려고 나온 마을의 한 목장 주인에 의해 하의가 벗겨진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이완임 할머니의 시신, 발견 당시 다리가 X자 형태로 모아져 있었다>

     

    신고를 받고 즉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육안으로 검시 된 결과 성폭행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하의가 벗겨져 있었기 때문에 추행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당시 버스가 딸이
    살고 있는 집까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 걸어가다 범인의 눈에 띄어
    목초밭으로 끌려 가 살해된 것으로 보였고 연락을 받아 현장에 달려온 안녕리의 딸에 의해
    신원이 바로 확인되었으며 그녀의 안타까운 통곡만이 주변을 메울 뿐이었다.

     

    당시 현장 주위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가을이어서 이슬이 내린 이유도 있어 범인의 지문, 유류품, 족적
    같은 흔적이 일절 발견되지 않았으며 피해자의 고무신과 양말 등만이 현장 주위에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당시 발견된 이완임 할머니의 고무신과 양말, 열무와 고추를 팔아 장만한 몇 푼의 돈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부검결과 사인은 액살(목을 조르는 것)이었으며 피해자의 양말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감정한 결과 질액은 양성 반응이 나왔으나 정액 검출과 질 내에서의 정액 반응 모두 나오지 않았고
    시신이나 현장에서 범인의 모발이나 체모 같은 것들을 수거하는데도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만다.

     

    이윽고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목격자 탐문수사와 주변 우범자들 및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며
    사건 당시 그들이 현장을 배회하다 이완임 할머니를 추행 후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우범자들이나 전과자들은 늦은 새벽엔 잘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 한 꼴만 되고 만다.

     

     

    제2차 사건


    1986년 10월 20일 오후 2시경, 송탄시 신정도에 살고 있던 박현숙양(당시 25세)은 태안읍 송산리에 사는
    수양어머니인 허모씨(당시 45세)를 만나기 위해 태안읍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뛰어난 미모로 동네에 소문이 났던 박현숙양은 허모씨가 좋은 남자가
    있으니 집에 와서 만나보라는 제안에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예쁘게 차려입고 허모씨의 집에서
    남자와 간단히 식사를 한 뒤, 오후 8시 50분경 더 놀다가라는 수양어머니의 만류에도 평소처럼
    마을 입구까지 그녀의 배웅을 받은 뒤 1킬로미터 정도의 긴 농수로 둑길을 걸으며 흐린 날씨로
    캄캄한 사방을 헤치며 송탄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10월 23일 오후 2시경, 진안리 논 주인에 의해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인 작은 농수로의 콘크리트 수로 속에서 알몸인 체 사망해 있는 것이 발견되고 만다.

     

     

    <박현숙양의 소지품 가운데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어쨌든 현금이 없어졌다>

     

    그녀의 가슴에는 흉기(드라이버 같은)에 의해 찔린 듯한 상처가 여러 개 있었고

    등에도 흉기로 찍힌 듯한 상처와 하체에서 강간당한 흔적이, 그리고 피해자의

    스타킹이 목에 감겨 있었으며 사인은 액살로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고 한다)

     

    또, 옷가지들은 농수로 둑에 버려져 있었고 부검결과 정액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으나
    혈액형 분석에는 실패했으며 피의자의 것으로 보이던 우유팩, 담배꽁초, 모발이 수거되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감정한 결과 B형으로 판정되었다.

     

    한편, 평소 박현숙양을 예쁘다고 말하며 취조 과정에서 늘 '현숙이 예쁘다, 현숙이 예쁘다'라고
    말한 용의자가 있었으나 수사결과 사건을 저지를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결과가 나왔으며
    많은 사람을 용의 선상에 올려 조사했음에도 유력한 용의자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만다.

     

     

    제3차 사건


    1986년 12월 12일 오후 6시경, 공장에서 작업이 끝나자 버스를 타고 남편 김씨(당시 27세)와
    함께 그의 직장이 있는 수원시 세류동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저녁 식사를 한 뒤 늦기 전에
    귀가하라는 남편의 재촉에 따라 10시 30분경 버스에 올라타 11시가 약간 지나 안녕리 삼거리에 내린
    권정분씨(당시 25세), 삼거리 바로 앞 정수섬유 밑으로 나 있는 작은 도로를 걸어 집으로 향하던
    그녀는 집까지 불과 1백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서 범인의 습격을 받게 된다.

     

    당시 처절한 비명에도 겨울밤의 비명소리는 어둠에 묻힌 체 그녀는 범인에게 논바닥으로 끌려가 손이
    뒤로 묶인 뒤 스타킹과 거들, 팬티가 차례대로 벗겨졌고, 그녀가 더는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거들과
    스타킹으로 입에 재갈을 물린 후 성폭행한 뒤에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교살(목을 매는 것)한 것으로
    추측되며 범인은 시신을 모래 부대가 있는 신화기업 둑 밑의 모래 부대 밑에 은닉하였다.

     

    이 때문에 안타깝게도 권정분씨는 4개월여가 지난 1987년 4월 23일 송장 축대
    밑에서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던 논 주인 김모씨(당시 29세)에 의해 발견되고 만다.

     

     

     

    자신의 집에서 불과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그녀는 하의가 벗겨져 있었고 입에는
    스타킹과 거들로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피묻은 팬티는 얼굴에 쓰인 체 부검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패한 상태였지만 현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이 발견되며 신분확인이 되었다.

     

     

    제4차 사건


    1986년 12월 14일 일요일, 태안읍 안녕리에 있는 정수섬유(세번째 피해자인
    권정분씨가 다닌 동흥제과 바로 옆에 있던)에서 오전근무를 마치고 오후 늦게
    수원 시내의 한다방에서 맞선을 본 이계숙양(당시 22세).

     

    관항리에서 당시 미인으로 유명했던 그녀를 상대 맞선남은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 또한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부모들의 퇴장 후 자리를 옮기고 옮기며 그렇게
    선자리는 밤 10시가 넘어 막차가 끊어질 때 즈음에야 끝나게 된다.

     

    그렇게 맞선남과 헤어져 시내버스에 올라탄 그녀는 제법 굵어진 빗줄기 때문에 정수섬유에
    딸려 있는 기숙사에서 잘까도 생각하지만, 집에서 걱정할 어머니와 오빠를 생각하며 마을에서
    1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던 종점인 정남면 면소재지에서 내리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당일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밤새도록 그녀를 기다린 끝에 날이 밝자마자 맞선남을
    비롯 해 여기저기 전화해보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자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한편, 당시 세 번째 피해자였던 권정분씨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성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던 경찰은 밤 11시경 정남면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이 나타나며 행방불명으로 판단해 농수로와 관항천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찾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경찰이 사건을 조사하며 당시 버스 운전기사가 선을 보기 위해 곱게 단장했던
    이계숙양을 종점에서 내려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사건 발생 일주일이 되던
    12월 21일 경찰과 그녀의 가족을 포함한 주민은 관항리 일대를 샅샅이 뒤지다
    낮 12시 30분경 관항천 둑에서 들깻단으로 덮여 있던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육안 검시 결과 그녀는 양손이 블라우스로 뒤로 묶였고 거들을 머리에 뒤집어 쓰인 체 스타킹으로
    목을 졸려 살해된 것으로 보였으며, 블라우스를 벗겼음에도 겉옷이었던 빨간색 투피스가 입혀져 있었다.

     

    한편, 그녀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핸드백과 우산, 손수건 등의 유류품들도
    들깻단 속에서 나왔으며 우산 손잡이 쪽에 혈흔이 묻어 있고 하체가 난행당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우산으로 그녀의 하체를 난행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참혹한 모습에 어머니는 현장에서 기절하고 말았으며 경찰 역시
    진저리를 치며 부검을 위해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낸다.

     

    그 결과 우산대로 하체를 난행했다는 결과와 손수건에서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사건 당일
    비가 왔고 정액이 묻은 것도 일주일이나 지났기 때문에 범인의 혈액형을 판독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며
    B형의 혈액이 검출되나 이계숙양의 혈액형도 B형이었기에 정확한 감정이 불가능하였다.

     

     

    범인에게서 벗어난 최초의 생존자

     

    이맘때 즈음 광범위하게 탐문수사를 벌이던 수사본부 형사들은 어느 마을에서 여자가 범인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을 접하고 해당 마을의 주민에게 접근하나 만나는 사람마다 공개하지 않으려고

    해 범인의 유일한 목격자일 수도 있는 여인의 행방을 쫓는데 난항을 겪게 된다.

    (이는 당시 여성이 강간피해를 보면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남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남편 역시 강간당한 부인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일이 많아 가정파탄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한 목격자일지도 모를 피해자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던 수사본부의 형사들은
    주민에게 집요한 요구와 반 위협을 한 끝에 남편도 모르게 강간 피해 여성을 만나 당시 상황을 듣게 된다.

     

     

     

    1986년 11월 30일 , 정남면에 살고 있던 김모 여인은 밤 9시가 넘어 교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고
    그녀가 집을 나와 3백 미터쯤 교회를 향해 걸어갔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쫓아와 그녀를 덮쳤다.

     

    사내는 뒤에서 한 손으로 목을 감고 한 손으로는 옆구리에 날카로운

    흉기를 들이댔는데 흉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소리 지르지 마, 소리 지르면 죽여버리겠어!'라는 말로 위협하던 사내는 여인을 길에서

    떨어진 논둑으로 끌고 갔고, 여인은 이에 당황하여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한편, 사내는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여인을 강제로 끌고 논바닥으로 2백 미터쯤

    들어갔으며 이는 소리를 질러도 길에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길이었고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였으나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윽고 사내는 여인을 논둑에 쓰러뜨려 '양말부터 벗어!'라고 여인의 옷을 벗게 했으며,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시끄러워! 죽고 싶어?'라며 흉기로 다시금 위협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여인은 양말을 벗기 시작했고, 그러자 사내가 재빨리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묶은 뒤
    거들과 팬티까지 벗겨서 팬티로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거들은 얼굴에 뒤집어씌웠다고 한다.

     

     

     

    이후 짐승처럼 여인을 성폭행한 여인의 입에 물린 팬티를 꺼내고는 '소리를 지르면 네년을 죽여버리겠어!
    돈 어디 있어?'라고 물었고, 여인이 '아까 끌려오다가 논둑에 떨어뜨렸어요'라고 대답하자 '이런!'이라는
    말과 함께 여인에게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뒤 돈을 찾으러 논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여인은 그때 몸을 일으켜 손이 뒤로 묶여 있고 거들이 얼굴에 뒤집어 씌워져 있던 체로 칠흑같이
    어두운 논바닥에 엎어져 뒹굴기도 하면서 집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범인이 뒤를 쫓아 올까 봐 공포에 질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체로 한참을 달리다가 숨이 차 주저앉아
    뒤를 돌아보았으나 다행히 범인이 쫓아오지 않고 있는 것을 알고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킨 뒤에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해 마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을 향해 처절하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을 한 여인은 밤이어서 어두워 범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머리가 짧고 얼굴이
    갸름했으며 키는 160에서 170 정도로 호리호리한 몸매였고 20대 후반의 저음 목소리로 들렸다고

    형사들에게 진술하면서 처음으로 범인의 윤곽을 알게 되었음에도 피해 발생 당시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면 현장 수색을 통해 범인을 검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동시에 얻게 되는 일이었다.
    (물론 당시 사회상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녀가 진술하는데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 수 있다)

     

     

    제5차 사건

     
    1987년 1월 10일,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어려운 집안을 돕기 위해 취직을 서두르던 홍진영양
    (당시 19세)은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수원시 북문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 저녁 8시 30분까지 이야기를
    나눈 뒤 태안읍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 50분경 태안읍에서 내려 진안리를 거쳐 갈 시에 20분이나 더
    걸리기 때문에 지름길을 택해 수원시 세류동을 지나 태안읍 진안리와 경계인 반정리 정류소에서 내린다.

     

    그리고 황구천 둑길로 걸어 들어가 멀리 엔젤악기의 하얀 공장과 집이 있는 안녕리의 낮은 산동네가
    보이자 걸음을 재촉하며 둑 중간쯤 온 그녀는 짚가리가 쌓여 있는 곳에 숨어 있던 범인의 습격을 받고 만다.

     

    다음날 10일 아침, 해당 논의 주인이 볏짚을 옮기려다 볏단 속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으며, 현장에 도착한 경찰의 육안검사 결과 그녀는 양손이 브래지어 등으로
    묶여 있었고 목에는 목도리가 감겨 있었으며 사인은 목도리로 인한 교살로 밝혀졌다.

     

     

     

    한편, 수사본부 현장에서 체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곳에서 발견된
    그녀의 시신은 특이하게도 옷이 모두 입혀져 있었고 경찰은 현장 주위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음모, 찢긴 천조각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낸다.

     

    시신부검결과 정액이 검출되었고 천조각에서도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으며 질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질액과 정액이 검출되었지만, 혈액과 섞여 있어 범인의 혈액형을 판별할 수
    없었으나 천조각과 음모 등에서 나온 혈액형은 모두 B형으로 판독되었다.

     

    당시 안타깝게도 신원 확인을 위해 홍진영양의 아버지가 현장에서 만 18세 딸의 시신을
    확인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경찰이 현장 보존을 위해 접근을 차단하여 딸을 안아주기는커녕 그녀의
    옷가지만을 확인해야 했고, 곧 현장에 달려온 자신의 아들과 통곡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홍진영양은 아버지가 건축일을 하고 어머니가 공장에 나가 돈을 버는 것이 안쓰러워
    부친의 날씨가 풀리면 취직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서둘러 취직자리를 알아볼 정도로 효녀였으며
    충남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중학교 때까지 충남 도대표 탁구선수를 하며 이때 동안 80개가 넘는
    상장과 메달을 받았을 만큼 학업에도 열심이었던 것이 밝혀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제5차 사건까지 오면서 경찰은 정남면 관항리에서 있었던 제4차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태안지서에서 불과 반경 2킬로미터 이내에서 사건이 발생했으며,
    범행수법이 유사해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인식이 짙어졌고 언론도 홍진영양 사건이 발생하자
    화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보도를 시작하며 경찰측엔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경기도 경찰국이 수사본부에 형사들을 대대적으로 투입하고 경찰들은

    목격자 탐문수사와 홍진영양의 당일 행적 조사에 집중적으로 나서면서도 해당 사건을

    연쇄살인사건의 관점에 놓고 분석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방법이 전통적이고 관행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지금처럼 과학수사가 익숙하지 않았고 기술과 장비들도 낙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과학수사에 대한 교육도 형사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FBI에서 첨단 수사기법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형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었고, 단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원들
    일부만이 감정 분야의 연수를 마친 것에 지나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연쇄살인사건 수사 방법이 아닌 피해자 주변의 우범자,

    목격자들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수사와, 반상회를 통한 전단 살포,

    동일 수법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대 청년들에서부터

    50대까지 많은 주민이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당시 화성의 불량들은 모두 조사를 받게 되었으며 동일수법의 전과자, 정신이상자, 변태성욕자들을
    대상으로 한 집중적인 수사에도 불구, 범인에 대해 어떠한 단서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한편, 범인은 교활하게도 흉기나 족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범행장소가 논바닥과 냇둑이었기에
    족적을 채취하지 못했으나 사건 발생 하루도 되지 않은 현장에서조차 족적을 채취하지 못
    했다는 것은 당시 초동수사에도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흔적조차 알 수가 없는 범인의 잇따른 연쇄살인에 화성 주민은 공포에 떨기 시작했고,
    이러한 가운데 세 번째 사건의 피해자였던 권정분씨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화성의
    여자들은 밤에 외출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해가 지면 서둘러 귀가하는 등 어느덧 화성은
    공포의 마을이 되고 말았다.

     

     

     제6차 사건

     

    1987년 4월 23일 안녕리에서 세 번째 피해자였던 권정분씨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화성은
    마치 유령이 돌아다니는 듯하였으며, 홍진영양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수사본부의 경찰이
    권정분씨의 사건에 투입되면서 매일 같이 열리는 수사회의와 밤늦게까지 우범지대를 순찰하고
    상부의 독촉은 성화와도 같아지며 그들은 파김치가 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수사본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며 마치 경찰의 피를

    말리는 듯한 수사를 지속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987년 5월 2일 토요일 저녁, 그날은 봄인데도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으며 태안읍을

    관통하는 수인사업도로 바로 위에 있는 진안리의 가정주부였던 박은주씨(당시 29세)는 밤 9시가

    지나면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자 늦게 귀가하는 남편이 걱정되어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가게 된다.

     

     

     

    청색 츄리닝 바지와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청색 츄리닝 상의를 걸친 채 밤 9시 30분경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박은주씨, 그녀는 밤 10시경까지 기다렸으나 남편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빗줄기는 더욱 억세게 쏟아지기 시작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한편, 박은주씨의 남편은 밤 10시 30분경 수원에서 버스를 타고 11시경에 부인이 기다리던
    버스정류장에서 내렸으며,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집으로 달려갔지만, 집에는 아내가

    없었으므로 이웃집에 마실 이라도 간 것으로 생각해 아내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내는 밤새도록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다음날 불안한 가운데도 직장을
    출근해야 했던 남편이 출근 후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으나 부인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박은주씨가 실종된 지 이틀이 지나자 결국 남편은 가출인 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경찰은 그녀의 행적을 수사하기 시작했고, 실종 당일 그녀가 밤 10시가

    약간 넘어 버스정류장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목격한 마을 사람의

    증언과 버스정류장 바로 밑에 있는 논바닥에 샌들 한 짝이 버려져 있는 것을

    논의 주인이 모내기 준비를 하다가 발견한 것을 알아내기에 이른다.

     

    이에 경찰은 이때까지 살인사건들이 모두 지서 남쪽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근거로 몇 차례에 걸쳐 전경들까지 동원하며 태안지서 남쪽의 하천과 농수로,

    농로 등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나 박은주씨를 찾지는 못한다.

     

     

    그렇게 박은주씨가 실종된 지 일주일이 되었던 5월 9일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야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무덤 옆에 소나무 가지치기를 하여
    쌓아놓은 솔가짓단에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생긴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당시 수인산업도로에서 불과 3백 미터 떨어진

    야산이었으며, 박은주씨의 집에서 불과 2백 미터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신고를 받은 지서의 순경이 달려와 시신을 확인하여 수사본부에

    연락하였고, 현장에 도착한 수사본부 형사들은 경악하게 된다.

     

    박은주씨의 시신은 상체가 완전히 벗겨진 채 양손이 뒤로 묶여 있었고, 목에는

    블라우스와 브래지어가 감겨 있었으며 츄리닝 바지는 다시 입혀져 있었다.

     

    현장 주변에는 우산 2개와 피해자의 상의 츄리닝, 팬티 등이 버려져 있었고
    현장에 도착한 형사들은 시신의 참혹한 모습에 고통스러워 했으며 연락을
    받고 달려온 남편은 부인의 모습을 보고 비통해했다.

     

     

    한편, 경찰은 즉시 사체 부검을 요청하고 유류품 감정에 나섰는데 박은주씨의
    상의 츄리닝 점퍼에서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으며 감정 결과 혈액형이 A형이라는
    것이 밝혀지나 그녀의 남편도 혈액형이 A형이었기 때문에 이때까지 B형으로 보였던
    범인의 정액일 것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네 번째 사건의 피해자였던 이계숙양 때와 흡사한 듯 보였으나 입에 재갈이

    물려 있지도 않았고 얼굴에 팬티나 거들 같은 내의류가 씌워 있지는 않았다,
    시신이 일주일 후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팬티에서 정액 양성 반응이 있었으나 혈액형 분석이
    어려웠고, 츄리닝 점퍼에서 나온 정액 분석 결과 A형으로 판독되며 한동안 공범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과 화성 연쇄살인사건과는 별도의 사건이라는 추정이 나돌기도 하였다)

     
    여섯 번째 살인사건인 박은주씨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중 하나이다.

     

    사건 당일 억수같이 내리던 비들과 차들이 쌩쌩거리고 달리는 대로에서 납치되어 살해당한 것이 그것인데,
    당시 수인산업도로는 늦은 밤에도 차량이 쌩쌩거리며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로에서 납치할 시 차량의
    전조등에 범인 자신의 신분이 그대로 노출되었을 것이므로 경찰은 면식범의 범행으로 추정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비가 억세게 쏟아지는 날 평범한 가정주부가 면식범을 따라 야산까지 올라갔다가 살해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더더욱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당시 발견된 245mm정도의 범인의 족적>

     

    상황이 이렇자, 경찰은 매스컴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했고 시민의 항의 전화도 빗발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강간사건과 같은 잇따른 유사 사건을 제외하고는 화성은 갑자기 잠잠해졌다.

     

    한편, 수사본부는 정신이상자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어느 도시에나 한둘 있는 여자들이 지나가면 자신의 성기를 꺼내놓고 흔드는
    부류의 사람도 용의 선상에 올려 형사들이 그들의 동태를 항상 감시하기도 하였다.

     

     

    용의자 검거

     

    그러던 1987년 9월 19일, 수원과 팔탄면 사이에서 김모양이 30대의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긴장한 경찰은 즉각 목격자 수사에 나서 두 달여의 추적 끝에 범인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처음 이 사건의 범인을 일부 신문에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보도하기도 하였으나 아쉽게도 단순 강간범으로 드러나 경찰의 속을 태우게 되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6차까지 발생하면서 수사본부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상부의 질책도

    잦아졌으며 더불어 제보도 많이 들어오면서 수사본부 형사들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한편, 당시 비 오는 날 빨간 옷을 입으면 살해된다는 괴소문이 퍼지면서 주민이 빨간 옷을

    꺼리는 일이 있었으며 태안읍의 한 다방에서 다방 아가씨와 장난을 치던 홍모씨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살해된다, 너도 빨간 옷을 입으면 살해된다'라고

    말한 것을 다방 아가씨가 신고하여 형사들이 수사에 나서는 일도 생겼다.

     

     

     

    당시 홍모씨는 40세로 혼자 살고 있었으며 이는 이때까지 있었던 범행으로 미루어 본

    범인의 조건에 들어맞었기 때문에  형사들에게 번갈아 계속해서 심문을 받게 되었고,

    그러하던 중 홍모씨는 마침내 자백하기에 이른다.

     

    '부인과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아들과 두 아들을 데리고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사 먹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자장면을 먹으면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

    자다가 깨게 되면서 갑자기 여자 생각이 나 박은주씨(여섯 번째 피해자)를 만나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 추행한 뒤에 살해했습니다'

     

    위와 같이 홍모씨가 자백하자 형사들의 추궁은 더욱 가혹해졌고, 이에 홍모씨는 권정분씨

    (세 번째 피해자), 이계숙양(네 번째 피해자) 사건도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시인하기에 이른다.

     

     

    한편, 홍모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증거 확보에 나선 형사들은 권정분씨를 위협할 때

    사용했다는 손톱깎이 칼을 홍모씨의 집에서 증거로 확보했고, 박은주씨를 폭행한 뒤에

    옷을 입으면서 발로 머리를 찼다는 홍모씨의 증언처럼 부검 결과에도 그녀의 이마에

    타박상 흔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며 이를 정황증거로 내세웠다.

     

    그리고 형사들은 일단 검찰에 구속영장을 청구하나 검찰은 홍모씨의 자백은 객관성 및

    일관성이 결여 돼 신비성이 없으며 범행에 대한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고 만다.

     

    이렇게 석방되자 이후 기자회견에서 홍모씨는 '자수할 생각으로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집사람이 가출하여 발작증세를 일으켜 술 한 잔 먹고 저지른 일입니다'라고 말했다가
    범행을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아닙니다, 자백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자신의 말을 번복하기도 한다.

     

    이후 경찰은 홍모씨의 부인을 찾아가 홍모씨가 붉은 옷에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구속영장에 넣어서 청구하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당시 홍모씨를 심문했던 하승균 형사는 그를 추궁했던 형사들의 집요함에 못 이겨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172cm에 72kg인 홍모씨는 제6차 사건에서 발견된 245mm의 족적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후 홍모씨는 다방 아가씨에게 농담 한마디 했다가 사흘 동안 잠도 못 자며 조사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한편, 홍모씨 이후로 용의 선상에 오른 현장 부근인 진안리에 살았던 당시 22세의 문모씨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60대의 할머니를 강간하고 동네 부녀자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거나
    친척을 폭행하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나며 수사본부의 조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형사들의 강력한 추궁에 이완임 할머니(첫 번째 피해자)와 박은주씨(여섯 번째 피해자)

    사건의 범행을 자백하게 되었고, 박은주씨를 살해할 때 사용했다는 흉기인 손톱깎이를 농수로 둑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을 토대로 경찰이 금속탐지기를 사용해 찾아내어 증거물로 제출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검찰은 자백에 임의성이 없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11쪽에 이르는 수사지휘서를 첨부하여 구속영장을 되돌려 보낸다.

     

     

    이후 문모씨는 석방된 뒤에도 한 여중생의 밤에 침입하여 강간하려다가

    발각되어 달아나는 일도 있어 형사들이 한동안 계속 조사를 하기도 한다.

     

     

    수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한편, 잇단 용의자들의 구속영장 기각과 그래도 연말연시 분위기에 들뜬 수원시내와

    화성 일대와는 다르게 연말연시도 없이 갑호 비상명령을 받고 연말연시 강력 범죄 발생에

    대비하던 중에 화성 인근 지역인 수원시 화서역 부근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며

    화성 주민과 경찰들에게 1987년은 가장 잔혹한 1년으로 기억되게 된다.

     
    198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엄마가 사온 케이크를 먹으려다 언니와 가족들과 같이 먹으라는

    말에 발끈해 케이크를 먹었다가 꾸중을 듣고 집을 뛰쳐나온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미순양은
    가톨릭대 간호학과에 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지며 대학입시에 실패한 후로 사소한 야단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을 뛰쳐 나와 울면서 농수로를 걸어가던 그녀는
    실종되었다가 1988년 1월 4일 수원시 화서역 근처의 논에서 논 주인인 김모씨가 볏짚을 경운기에

    실으려고 옮기다가 볏짚 속에 웅크리고 죽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만다.

     

    김모씨의 신고로 출동한 수원경찰서 강력계 팀은 육안 검시를 하기 시작했고,
    김이순양은 다른 화성 연쇄살인사건들과 비슷하게 엎드린 체 두 손이 뒤로 묶여 있고 하의가

    완전히 벗겨져 있었으며 입에는 팬티로 재갈이 물리고 양손이 스타킹에 의해 묶여 있었다.

     

    부검 결과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으며 김미순양이 살해되었을 때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경찰은 피해자 가족을 찾기 시작했고, 화서동 일대와 오목천동

    일대를 뒤지자 가출인 신고를 한 김이순양의 부모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경찰의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온 부모들은 비통해했으며, 특히 실종 당일 케이크 때문에

    야단을 쳤던 김미순양의 어머니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몸부림치며 울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한편, 당시 수원 경찰은 화서역 인근에서 발생한 이 사건이 화성 근처에서 일어났음에도 연쇄살인사건에

    포함하지 않은 채 수원 정자동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여 독자적으로 수사를 시행한다.
    (이 사건은 결국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포함되지 않고 88년 수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제7차 사건


    '88 서울 올림픽'을 불과 열흘 앞둔 1988년 9월 7일, 장남이 운영하는 수원시내의 분식집에서 일을 거들고
    밤 8시 40분경 수원극장 맞은편에서 발안행 시내버스를 타고 가재리에서 내려 야산을 넘어가기 위해
    양쪽으로 논이 있는 소로를 걸어 소하천을 건던 뒤 야산을 넘으려던 안기순씨(당시 54세), 그녀는 범인에게
    납치되어 미루나무가 있는 위쪽으로 끌려 올라가 비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안기순씨의 남편은 그녀가 버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밤새도록
    기다리다가 친척들에게 연락으로 하여 날이 밝기가 무섭게 안기순씨를 찾아 나섰는데,
    그들은 버스정류장 일대를 샅샅이 뒤지다가 남편의 사촌 동생 백모씨(당시 45세)에 의해
    풀숲에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 채로 반듯하게 눕혀져 있는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수사본부에서 출동한 형사들의 육안 검시로 그녀의 양손이 블라우스로

    묶여 있고 입에는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 끈으로 목이 졸려

    살해된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드러났고 당시 입고 있던 쥐색 치마는 다시 입혀진 것을 알아냈다.

     

     

     

    이밖에 그녀의 시신은 너무나 처참하였는데,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감정전문가들과

    치안본부의 감식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유류품을 수거한 뒤에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

    부검한 결과 안기순씨의 국부에서 복숭아 먹던 것이 나오게 된다.

     

    한마디로 범인은 범행 당시 안기순씨를 납치하여 추행한 뒤에 목을 졸라 살해하고, 그 옆에서

    태연히 복숭아를 먹다가 이와 함께 양말을 국부에 집어넣고 우산대로 난행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범인의 천인공노할 범행에 형사들은 다시금 범인이 악마라는 것을 깨달아 더욱 비장한

    각오로 수사에 임했으며, 당시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서 경찰의 통제로 안기순씨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울부짖는 가족들의 비참한 모습이 형사들을 분노케 하였다.

     

    한편, 목격자 탐문수사 끝에 수원시 세류동에 살고 있던 22세의 김모씨가 현장 주변에서 배회했다는
    주민의 진술을 확보한 형사들은 사건 당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추궁하나 김모씨가 살인마가 아니라는
    증인이 여럿 나타나면서 사건은 다시 범인의 윤곽조차 잡을 수 없던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신문과 방송 등의 언론을 통해 연일 무능한 경찰이라는

    질책과 집중포화가 계속되자 결국 화성경찰서장이 문책을 당하고 교체되기에 이른다.

     

     

    두번째 목격자, 그리고 몽타주


    한편, 가재리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지며 목격자 탐문수사에 전력을 기울이던 수사본부 형사들은
    안기순씨가 가재리에서 버스에서 혼자 내린 것으로 밝혀내며 범인이 버스를 타고 돌아갔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 사건 전후에 가재리를 지나간 버스를 찾은 끝에 한 버스 운전기사로부터

    사건 발생 시각인 밤 10시를 전후로 가재리를 지난 것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해당 운전기사 강원태씨는 사건 당일 사건 현장 부근의 논길 쪽에서 젊은 남자가

    왼쪽 손에 옷을 들고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버스를 세웠다.


    그리고 버스에 올라탄 남자는 비어 있던 맨 앞자리에 앉았고 수원까지 가는 동안 버스 앞좌석에

    앉자마자 왼쪽 발을 운전석 옆에 있는 보닛에 올려놓아 기에 강원태씨는 발을 내려놓으라며

    서너 번 말다툼하였고, 자신에게 담뱃불을 빌렸기 때문에 강태원씨를 비롯해 동승 했던 안내양

    엄모양까지도 당시 남자의 인상착의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짧은 상고머리에 눈이 날카롭고 코가 오똑하며 얼굴이 갸름한 편이라 전체적인 인상이

    차가웠으며 보닛에 올린 남자의 발은 운동화가 젖어 있었고 바지 역시 무릎까지 젖어 있었으며
    담뱃불을 빌려 양손으로 감싸 쥐며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오른쪽 둘째손가락에 작은 흉터와

    새끼손가락에 봉 숭아물을 들인 흔적이 있었고 시계를 찬 왼손 손목에 밤알 크기 정도의 문신

    (혹은 점)이 있는 것을 보았으며, 키는 168센티미터 전후로 남자 키로는 작은 편이었고 몸집이

    호리호리하고 어깨가 약간 구부정해 더욱 왜소해 보였으며 25-27세쯤 되어 보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이 남자는 대한방직 앞에서 내리려다가 수원역 앞에서 내렸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해 범인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는 듯 하여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안기순씨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열흘도 되지 않아 진안1리에서

    13세의 중학생이 집안에서 살해된 것이 발견되자 경악하게 된다.

     

     

    집안에서 일어난 살해사건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하루 전인 1988년 9월 16일 오전 6시 50분경, 진안 1리

    야산 북쪽 기슭에 살고 있던 박상희양(당시 13세)이 아침에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자 어머니가 깨우려고 보니까 죽어 있었던 것이 발견된다.

     

    당시 어머니가 이불을 벗기자 하체가 벗겨져 있었으며 이에 너무나 놀라 울음조차 나오지 않던 어머니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였고, 이에 출동한 수사본부 형사들은 불과 한 평 반쯤 되는 작은 방에서
    싸늘하게 죽어 있는 어린 소녀를 보고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으로 입조차 벌릴 수가 없었다.

     

    박상희양은 손으로 목을 졸린 듯 목에 선명하게 손자국이 나 있었으며,

    얼굴에는 죽기 전 몹시 고통스러웠던 듯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형사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한편, 박상희양은 기존의 화성 연쇄살인사건과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죽어 있었는데
    사인이 손으로 목을 조른 액살이었고 흉기를 사용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며
    손발을 묶거나 입에 재갈을 물리지도 않아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와 슬리퍼로 보이는 희미한 물결무늬의 족적을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모발에서 티타늄이라는 금속성분 잔류가 다른
    사람보다 많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범인이 용접이나 페인트 작업을 많이 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의 특성을 분석했기 때문에 동일한
    음모를 찾으면 범인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수사본부에 동일 음모를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형사들은

    화성 일대의 공장 32곳의 종업원들로부터 모발과 음모를 수거하여 감정을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모발을 강제로 채취당하기도 하였고, 형사들과 용의자들 간에
    음모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으며 특히 우범자들은 A라는 형사에게
    음모를 뽑힌 뒤 B라는 형사에게 다시 뽑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마치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다음 해 7월까지 형사들은 음모와 모발을 수거하는데 시간을 소모하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밀려들어 오는 음모와 모발을 매일같이 감정하느라 정신없던 차에 1천 5백여 명의 남자들 음모와 모발을
    감정한 끝에 22세의 방위병 윤영택이 범인의 음모와 동일한 감정결과가 나오기에 이른다.

     

    처음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윤영택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동위원소 감별법으로 오차가 최대 8백만 분의
    1에서 3천만 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물증 앞에서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하게 된다.

     


    윤영택은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피해자의 박상희양의 언니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9월 16일 밤
    언니가 그 방에서 자는 것으로 알고 침입하여 강간하려다가 저항하자 목을 졸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박상희양의 언니를 취재할 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질문에 간신히 답변하여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고 한다)

    한편, 경찰은 윤영택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에도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여죄를 추궁하였으나
    끝내 관련성을 찾지 못한 체 화성 연쇄살인사건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수사를 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박상희양 사건의 범인이 검거되면서 수사는 다시 안기순씨 사건으로 집중되었고, 박상희양

    사건 해결과 처음으로 나온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의 몽타주로 말미암아 고무된 형사들은 몽타주를

    위주로 용의자 수배에 나섰으며 취재기자들은 형사들이 용의자를 수배하기 위해 수원 시내까지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용의자의 별명을 '갑동'이라고 부르며 취재에 열중하기에 이른다.

     

     

    오목천동 여고생 살인사건

    수사본부의 고위간부들이 교체되거나 보강되었고 인원도 보충되어 수사요원만 110명을 넘게

    되었으며 서울 시내와 경기 도내 각 경찰서 강력계의 베테랑 형사들이 투입되어 활기를 띤 수사는,
    그러나 몽타주가 작성되었음에도 범인이 검거되지 않으며 형사들의 수사는 차츰 일상화되어 갔다.

     

    경찰은 화성 일대에 반상회를 열어 밤이면 여자 혼자서 외출하지 말 것과

    해가 떨어지면 외출 중인 여자들이 일찍 귀가하라고 요구했으며 화성경찰서는

    태안 일대에 대규모의 경찰력을 배치하여 밤마다 순찰을 하였다.

     

    그 때문에 화성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오히려 범죄가 줄어드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경찰의 순찰은 점차 강화되어 형사들이 잠복근무를 계속하자 화성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그러나 1989년 7월 3일, 수원시 오목천동에 살고 있던 Y여고 2학년 정모양(당시 17세)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

     

    정모양의 가족들은 밤 11시가 되어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학교와 딸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지만 정모양이 밤 9시경 야간자율학습이 끝나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만 듣게 된다.

     

    그리고 가족들은 고색파출소에 가출신고를 내기에 이르지만, 고색파출소에서 가출신고를

    접수한 뒤 수색을 하지 않는 우를 범하며 결국, 실종 일주일이 지난 7월 10일 농민 정모씨

    (당시 69세)에 의해 농수로가 움푹 패어 있는 풀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만다.

     

    정모씨의 신고와 고색파출소의 보고로 즉시 현장을 통제한 수원 경찰서는 강력계 형사들의
    육안 검시에서 정모양의 시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앞가슴과 등이 예리한
    흉기로 찔려 있었고 화성 연쇄살인사건처럼 손이 묶이거나 목이 졸리지 않았으며,
    가슴 한쪽이 도려내 져 있었고 국부가 난자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범인에 의해 도려내진 피해자의 가슴은 전경들을 동원하여 주변을 샅샅이 수색한 결과
    이튿날 현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되었으며 형사들은 고색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에 나섰으나 범행 수법과 지역이 달랐기 때문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유부와 국부가 예리한 흉기에 의해 도려내 져 있었고 사인은 다량의 출혈 탓인

    실혈사라고 하며,당시 성남과 고양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기에 별도의 사건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해당 사건은 신문을 통해 오목천동 여고생 살인사건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에 피해자의 어머니가 극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해 중태에 빠지고 마는
    일까지 생겼으나 정모양 주변을 수사하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수사를 맡았던 수원 경찰서는
    단순 치정 쪽으로 몰아 남자친구와 주변 불량배 10여 명을 조사하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한편, 목천동은 화성 연쇄살인사건 네 번째 피해자였던 이계숙양이

    발견된 현장에서 불과 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이처럼 88년 수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과 오목천동 여고생 살인사건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포함되지 않은것은 일차적으로 지역이 다른 까닭도 있었으나 두 사건까지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포함할 경우 있을 화성군 주민의 충격과 공포를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제8차 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일곱 번째 피해자 안기순씨 사건 이후 14개월 동안

    공식적인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던 주민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밤에 외출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워했고 여자들은 해가 지면 귀가를 서둘렀으며

    우범 지역이나 인적이 없는 야산과 들판에 대한 경찰의 순찰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1990년 11월 15일, 화성군 태안읍 능리에 살고 있던 김미정양(당시 14세)이 집에 누군가의

    생일로 음식까지 차려놓았는데도 밤 9시가 넘어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밤 8시가 넘자 학교 친구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경찰에 가출신고를 하기도 한 가족들은 9시가 넘자

    아버지가 불안을 견딜 수가 없어 인천에 사는 동생들에게 빨리 와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고,

    그렇게 김미정양의 친척들이 자정이 넘어서 인천에서 능리의 집까지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 완전한 실종이 아닐 수도 있으니 기다려보자고 말하며

    밤중이라 전경들을 동원할 수 없었던 경찰 대신 김미정양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능리에서 병점리 삼성석재가 있는 곳까지 오가며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11월 16일 아침까지 이어진 수색은 김미정양의 삼촌인 김모씨(당시 33세)에 의해 태안읍

    병점5리의 야산에서 하얀 속바지와 상체에 교복이 덮인 채 죽어 있는 김미정양이 발견되기에 이른다.

     

     

     

    이 야산은 경찰이 초소에 배치되어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호해주는 곳으로,

    낮에는 철수하지만 밤에는 경찰이 항시 배치되기 때문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그녀의 시체는 양손과 양발이 검은색 스타킹으로 뒤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사인은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인한 교살로 밝혀졌다.

     

    또, 상체는 옷이 벗겨져 있는 상태였고 하체는 흰색 속바지가

    입혀져 있었으며 스커트와 교복은 벗겨져 시체에 덮여 있었다.

     

     

     

     

    김미정양 사건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요원들이 직접 투입되어

    증거물들을 찾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모발을 40여 개나 수거할 수 있었고

    그중에 하나는 흰색이었으며 상의와 양말에서정액이 검출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시행된 부검에서 시신의 가슴에 칼로 난자한 상처가 여러 곳에 있었고 수저, 포크,

    볼펜을 질 내에 삽입한 흔적도 찾을 수 있었으며, 위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잡채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 잡채는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살해되기 두 시간 이내에 잡채를 먹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당시 가족 중 11월 15일에 생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미정양은 아침에도
    잡채를 먹고 점심에도 도시락에 잡채를 싸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심때 먹은 잡채는 이미 완전히 소화되기 때문에 적어도 저녁 7시경에 먹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집요한 탐문수사에도 이와 관련한 것을 밝혀내지 못해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였지만, '어떤 음식물이든지 일단 뱃속에 들어가면
    강력한 위산이 분비되기 때문에 2시간 이내에 소화되므로 피해자는 어디선가 잡채를

    먹은 것이 확실하다'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단호한 반박을 받게 된다.

     

    다만, 범인이 김미정양을 납치한 후 그녀의 소지품을 뒤지던 중 도시락을 발견하고 혹여
    남아 있던 잡채를 먹게 하는 비정상적이고 사이코적인 짓을 하지 않은 것임을 바랄 뿐이다.


    한편, 오후 5시경 학교에서 나와 친구인 이모양과 함께 병점초등학교 앞에서 헤어져 집으로

    귀가했던 그녀는 병점5리 오솔길을 지나다가 야산으로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당시 오솔길 앞에 세워져 있는 초소에는 경찰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피해자의 주변에는 전에 없이 많은 유류품이 남아 있었고 시신이

    일찍 발견되었기 때문에 유류품 수거도 쉬웠으며 여러 가지 검사도 할 수 있었다.

     

    도시락에서는 식별할 수 있는 지문도 채취되어 만약 범인이

    검거되면 증거로 대조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검과 감정에서 나온 범인의 혈액형이 B형이라고 밝혀졌으며 수거한 모발 등으로 유전자

    조사까지 마쳤기에 경찰은 조금만 수상하다 싶으면 유전자 대조로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만 광범위한 수사본부의 수사에도 끝내 범인은 자신의 악마와도 같은 자취를 보이지 않는다.

     

     

    제9차 사건


    김미정양의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여가 지난 1991년 4월 4일, 화성군 태안읍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동탄면 반송리의 야산에서 권순상 할머니(당시 69세)의

    시신이 발견되며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를 경악하게 만든다.


    이는 제2차 사건인 박현숙양 사건으로 수사력이 태안읍 일대에 집중되던 때 정남면 관항리에서
    이계숙양 사건으로 태안읍에서 20킬로미터나 떨어진 정남면으로 이끌었고, 다시 수사본부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씨 사건이, 경찰 초소가 눈앞에 있고 밤이면

    순찰을 하는 오솔길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야산에서 발생한 김미정양 사건, 그리고 태안읍에서 멀리

    떨어진 동탄면 반송리 진입로의 야산에 나타나기까지 신출귀몰한 범인의 범행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권순상 할머니는 사건 당일인 4월 3일 수원시 매탄동에 사는 큰딸 집에

    갔다가 저녁 6시 30분경 집을 나와 수원에서 8시경 버스를 타고 9시경에는

    동탄면 오산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반송리에 있는 집을 향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반송리 진입로를 향해 걸어서 집 앞 2백 미터 정도에 있는 야산에서
    범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다음 날 아침 소변을 보기 위해 밭둑을 걸어 올라간
    중장비 운전기사인 박모씨(당시 30세)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고 만다.

     

     

    권순상 할머니의 목은 검은 천으로 감겨 있었고 다른 사건들과는 약간 다르게 입에

    재갈이 물려 있지 않았으며, 손이 결박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하체에 내의만 입혀진 체
    제7차 사건의 피해자였던 안기순씨때처럼 질 내부에 양말이 삽입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들이 투입되어 유류품 수거와 감정에 나섰는데,
    질에 삽입되어 있던 양말에서는 질액과 함께 정액이 검출되어 분석결과
    혈액형이 B형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지문도 몇 개 채취되었다.

     

    당시 권순상 할머니가 살해된 곳은 집 앞에서 불과 2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야산이었는데, 살해 방법이나 시신 유기 방법이 기존의 사건들과 약간 달라

    형사들 일부는 이 사건이 모방범죄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화성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고 혈액형이 B형으로 밝혀지며 연쇄살인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에서 멀리 떨어져 그다지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았던
    동탄면 일대의 우범자들이 수사대상에 오르며 용의자들이 속속 검거되기에 이르나
    끝내 범인은 검거되지 않고 이 사건 이후로 화성 지역에서는 강간 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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